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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디 Oct 16. 2023

졸지에 효녀가 되었습니다

언니 이야기 | 언니가 바라본 동생의 출가

명문대를 다니던 동생이 뜬금없이 출가했다.

어느 날 머리를 빡빡 밀고 와서 말했다.

불교에 귀의할 거라고.


황당했다. 아니, 무서웠다.

잡다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출가하면 속세의 인연을 다 끊고 가는 건가?

나는 하나뿐인 동생을 잃는 건가?

아니, 대머리가 된 딸을 보고 가족들이 얼마나 충격받을까?


예상한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아빠는 절박하게 설득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사실 부모가 말린다고 출가를 번복할 거였으면 애초에 출가할 생각도 안 한다.

부처님은 부모님 허락받고 출가했나?

아빠는 둘째 딸을 다시는 안 보겠다고 선포하고 주저앉으셨다. (지금은 연락도 자주 하고 잘 지낸다)




나는 애초에 부모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큰 딸은 아니었다.

크게 엇나간 적도 없지만, 동생에 비해 더 자랑스러울 것도 없었다.


우리는 제주도에서 자랐다.

제주도에선 1세대로 뉴질랜드로 조기유학을 갔다.

당시 학교에서는 행정처리를 어떻게 할지 몰라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동생이 어리다 보니 영어를 배우는 속도가 나보다 확실히 빨랐다고 한다.


나는 운 좋게 외고를 갔다. 하지만 내신은 5-6등급.

동생은 제주도 집 옆 고등학교를 갔다. 언제나 1, 2등을 했다.


나는 이화여대에 갔다. 동생은 연세대에 갔다.

내 학점은 3점 초중반. 동생은 언제나 성적 장학금.


나는 초봉이 2800인 스타트업에 갔다.

아빠 눈엔 당연히 성이 안 찼다.

뉴질랜드 유학에 외고, 이대까지 보낸 교육비 ROI가 안 나온단다.

동생에게 더 기대가 커지기 시작했을 거다.

상관없었다. 나는 자랑스런 착한 딸, 효녀 역할을 기꺼이 동생에게 넘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동생은 아빠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그랬던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

난데없이 출가를 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저 속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효녀가 되어버렸다.

함께 여행을 가서 시중을 들고,

떠들썩하게 환갑을 챙겨드리고,

명절마다 내려가서 전 부치고,

내가 딸로서 그냥 했던 일들이 "특별 효도활동"이 되었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효녀 역할에 얼떨떨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동생의 출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언제든 상담할 수 있는 스님 같은 동생이 생겼다.

동생과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살 수 있다.

하나뿐인 상속 경쟁자가 제거되었다...?

아, 출가한 동생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동생아, 이 언니는 네가 어디서든 행복하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부모님이 딸들 서울 살이 편하라고 마련해 준 아파트였는데, 동생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니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에 최적화했다.


엄청난 양의 짐을 처분했다.

동생이 남기고 간 짐도 버렸다.

재택이 잦은 회사를 고려하여 재택 환경도 갖췄다. 혼수에 버금가는 가전도 사들였다.

목소리만으로 커튼을 닫고, 에어컨을 틀고, 조명을 켠다.




둘이 살던 집에서, 혼자 사는게 더 익숙해져버렸다.


매일 5시 반에 일어난다.

컨디션에 따라 주 2-3회 정도 아침 러닝을 한다.

출퇴근이 자유지만, 보통 7~8시 사이에 출근한다.

집중이 필요할 땐 가끔 재택도 한다.

야근할 때 빼고는 퇴근 후 요가를 하러 간다.


재택과 요가


운동/야근 후 집에 돌아오면 샤워하고,

은은하게 조명을 세팅해 놓은 후,

집안 곳곳에 있는 스피커에 노래를 틀고,

탄산수나 위스키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다. 웹툰을 읽는다.

돈 버는 직장인은 유료 결제도 서슴지 않는다.


크으... 성공한 30대 같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동생과
360도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서울 28평 자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동생은 시골 폐교에서 침낭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AI스피커가 틀어준 풀소리를 들으면서 자면,

동생은 진짜 풀소리를 들으면서 잔다.


내가 지방으로 임장하러 갈 때,

동생은 다른 시골로 농사 지원하러 간다.


나는 내 주식의 안녕을 위해 세계 평화를 바랄 때,

동생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세계 평화를 기도한다.


이제 동생이 출가한 지도 어느덧 9년.

분명 어느 시점까지는 그래도 비슷하게 살았는데,

이젠 서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부터 그 차이에서 오는 이야기를 풀어가 보려고 한다.

어떤 삶도 "틀린" 삶은 없다고.


▼동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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