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동생도 자본주의 언니도 잘 먹고 잘 삽니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번 추석에도 고향인 제주도에 다녀왔다. 동생처럼 출가한 것도 아니고, 별 사유도 없이 안 내려갔다간 아빠에겐 조상도 없는 호래자식이 되어버린다. 겸사겸사 연차까지 쓰고 딱 일주일이나 있다 왔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살아계셔서 그런지 명절마다 큰 집인 우리 집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추석 전날에는 으레 아빠가 수산시장에선 한치와 갈치를, 하나로마트에선 제주한우와 한돈을 한 박스씩 사 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작은 아빠들, 고모들, 사촌들 열댓 명이서 거실에 둘러앉아 제주도 특산물에 술 한 잔 곁들이며 그간의 회포를 푼다.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내고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는 시골집으로 넘어간다. 제주도 구좌읍 평대리. 몇 년 전만 해도 전국에서 공시지가가 뒤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시골이었는데 어느덧 아기자기한 카페와 펜션으로 가득 들어서있다. 다행히 오버투어리즘까진 아니어서 해수욕을 즐기는 관광객들 옆에 우리 같은 귀성객들이 고등어 낚시를 하다가 작살 들고 문어를 잡으러 튀어 나갈 만큼 한적하다. 그러다 지치면 바다와 인접해 있는 카페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카페인을 충전하기도 하다. 우리는 이번에도 열댓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문어와 보말을 잡았다.
사실 내 필명 '뱅디'는 시골집이 위치한 평대의 제주도 사투리이다. 정확히 말하면 '벵듸'인 듯. 그만큼 내 정체성은 제주도에 있다.
어릴 적 제주도는 마냥 좁고 답답하고 촌스러워 보였다. 제주도에서 나는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님 사이에서 스트레스 받던 학창 시절 기억만 남아있다. 게다가 또 좁은 사회 특성상 제주도는 내가 모르는 사람도 내가 뭘 하는지, 어디에 다니는지 다 알 정도로 남에게 관심이 많다. 이 집안은 어떻고, 저 집안은 어떻고, 지방 호족인마냥 다른 집을 평가하는 어른들은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어 보였다.
마냥 좁고 답답하고 촌스러워 보였던 제주도는 어느덧 내게 큰 안식처가 되었다. 서울에서 나름 치열한 20대를 보내고 나니 제주도의 좁고 답답하고 촌스러웠던 면이 아늑함으로 바뀌었다. 만약 내게 자식이 있다면 제주도로 고향을 물려주고 싶다. 힘든 세상 살다가 상처받더라도 잠시 재충전할 곳을 마련해 줄 곳. 숨통을 트여줄 곳. 그렇기에 먼 훗날 나도 연어처럼 제주도로 돌아가 내 삶을 마무리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추석에도 해변 카페에서 여유롭게 사촌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20대이기에 시험 준비를 하는 동생도, 휴학한 동생도, 이미 직장을 다니는 동생들도 최대의 관심사는 앞으로의 진로이다. 함부로 조언할 수 없기에 대부분 듣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나의 취준 시절로 가득했다.
10여 년 전 대학생들의 목표 진로는 대기업, 전문직, 공무원 셋 중 하나였다. 스타트업은 지금처럼 취준생이 고려하는 옵션에 있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대놓고 로스쿨 진학을 종용하셨다. 하지만 나는 시험도 싫고 경쟁도 싫었다. 그래서 당장 들어가기 쉬운 스타트업으로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다. 무의식적으로 잘 나가는 친구들과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도록 아예 비교표에서 이탈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난 "스타트업이니까", "디자이너니까" 연봉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깎아먹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회사는 얼마든 들어갈 수 있으니 힘들면 언제든 때려치워도 된다는 생각에 배째라며 회사를 다녔다.
대신 유학, 학사, 석사 등 내게 투자된 교육비 회수는 영원히 포기했다. 아빠는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도 모르셨다. 중소기업은 중소인 이유가 있다며 내 첫 연봉을 듣고 코웃음을 치며, 남들에게 얘기하기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의 예상과는 다르게 내 연봉은 빠르게 상승했고, 스톡옵션을 행사해서 돈도 꽤 벌었다. 돈 버는 것도 땡큐인데, 자유로운 환경에서 내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도피라고 생각했던 진로가 결국 내가 가장 '잘' 살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동생은 절에서 비구니로 살고 있다. 내 동생이 살고 있는 출가 수행자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를 것 같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깨달음과 수행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사회활동도 많이 한다. 내 동생은 필리핀 민다나오 오지에 1년 파견을 가 학교 설립을 지원했고, 워크숍이나 성지순례 등 업무 상 출국을 거의 매년 한다. 덕분에 속세와 단절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그 누구보다 영어를 마음껏 활용하고 있다. 비싼 돈 주고 다녀온 조기유학 영어를 거기서 쓸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물론 동생에게 들어간 교육비는 아빠도 애당초 포기하셨다. 아니, 포기하셨다기 보단 포기당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동생은 출가 전, 아빠에게 손절매를 하시던가, 수십 년에 거친 상환을 받으시라는 두 가지 옵션을 아빠에게 제출했고 아빠는 손절매를 택하셨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경제전문가인 아버지에게 맞춤형 옵션을 드리라는 것은 사실 내 조언이었다.
당시 동생의 출가에 대해 집안 모두가 반대하는데 언니인 나마저 반대하면 동생은 기댈 구석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내가 고작 3년 더 살았다고 동생을 막기엔 내가 세상의 모든 길을 알지 못하고, 평생 알 수도 없기에 조언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나 동생이 돌아오더라도 아무 말 없이 받아줄 품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빠는 언젠가 돌아가실 테고, 내가 동생과 가장 오래 같이 살아있을 가족이니까. 동생은 다행히 그 품을 쓸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동생은 사회활동가뿐만 아니라 농부로도 지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8,000평이 넘는 논밭을 관리하면서 매일매일 새까맣게 타고 있다. 어떤 것, 얼마나 심어야 할지 1년 치 수요를 예측하여 씨를 뿌리고, 친환경 농법으로 키워내, 겨울 김장까지 하고 나면 1년이 훌쩍 지나있다. 이 1년의 시간 동안 매일을 예불로 새벽을 깨우고, 해가 너무 뜨거워지기 전 밭일을 마무리하고, 오후에는 각종 활동에 대한 회의를, 일정한 시간에 잠이 든다. 동생은 시골에서, 농부로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기에 매일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수행하고 있다.
반대로 언니인 나는 서울에서 다른 직장인들처럼 해가 밝을 때는 사무실 안에서 틀어박혀 매일매일 창백해지고 있다. 하지만 자유로운 직장 덕분에 요즘엔 출근 전 책도 읽고 명상도 하다가 출근한다. 퇴근 후에는 피아노 학원이나 요가원을 가곤 한다. 최근 주말엔 플라워 클래스를 듣고 있는데 다음엔 어떤 것을 들을지 고민 중이다. 4월 뉴욕 여행 이후 파산 상태로 잠시 여행 중단을 선언했으나, 버릇은 남 못준다고 11월 일본 미야코지마 여행 티켓을 결제해 버렸다. 반복되지만 디테일은 다른 하루하루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수행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 자매는 이탈한 곳, 이탈한 시기, 이탈한 정도는 다르지만 어쨌든 둘 다 부모님의 깔아준 길에서 이탈했다. 이쯤 되면 그냥 유전인 것 같다고 작은 아빠가 농담하셨다. 알고 보니 아빠도 40여 년 전 할아버지에게 학비 받아놓고 몰래 다른 대학원을 갔단다.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 우리가 부모님이 깔아준 길을 달렸던 것은 "행복해 보이는 삶"을 위해서였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들의 삶을 충실히 사셨기에, 우리에게 "행복할 것이다"하는 길을 뚜렷하게 제시하셨다. 어린 나머지 그 길을 강요로 받아들였고, 그 길을 가야만 행복할 줄 알았다. 그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은 막다른 길인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어른들이 그렇듯 우리 부모님은 당신들이 보아온 세계만 자식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 물론 그 길이 안 좋다고 부정할 수 없다. 그건 곧 부모님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자식은 그 세상을 깰 수도 없고, 깨서도 안된다.
그러나 어느덧 부모님의 세상은 과거가 되고, 우리의 미래였던 세상이 도래했다. 이미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무한대로 있다. 나는 좋아 보일 것 없는 스타트업으로, 동생은 아예 속세에서 이탈, 출가를 하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20대의 성장통을 겪고 부모님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우리는 전문직/공무원/대기업을 못 들어갔어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남들이 몰라줘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비교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동생은 돈이 없어 행복하고, 나는 돈을 벌 수 있어 행복하다.
우리는 엄마가 돌아가셔도 감사할 줄 알고, 아빠가 우리 아빠여서 감사할 줄 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상황이더라도 행복할 줄 아는, 그래서 100% 행복할 줄 아는 삶을 배우고 있다.
그렇기에 이만하면 되었다. 회사에서, 절간에서, 시골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제주도에서, 우리 자매는 그 어디에 있더라도 잘 살고 있다.
그러니 엄마도 편하게 눈 감으셨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