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픔은 어학사전을 찾아보면 외로움과 쓸쓸한 감정이라 한다. 희로애락 중 '애 哀'에 해당하는 감정이다. 철학서에서 슬픔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못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과거가 현재의 완전성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 한다. 서글픔도 그런 것일까.
나의 경우는 그러했다. 더 이상 과거의 완전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였다. 슬픔은 한순간의 강렬한 감정으로 몰아친다면, 서글픔은 안개비처럼 조용히 밀려들어와 가슴을 적시게 되는 그런 감정이다.
2015년 여름 아빠는 폐암 수술을 하셨다. 나는 만삭 상태로 아빠의 수술을 지켜보았다. 수술 후 나온 아빠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새하얗던 아빠의 얼굴에서 미래가 보였다. 입 밖으로도, 글로도 표현하기 두려운 미래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미래를 바로 기억에서 지우려 했지만 지워지질 않는다.
아빠는 간암 발병 5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폐암이 확인되었다. 폐암은 폐 근처에 있는 임파선을 따라 주로 뇌와 뼈로 전이가 되는데, 아빠는 뇌로 전이가 된 상황이었다. 수술 후 뇌로 전이된 암을 감마 나이프라는 시술을 통해 치료를 했지만 완전히 나아지지 않아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2018년 1월, 이때만 해도 아빠는 시골에서 서울 병원까지 혼자 다니셨기에 홀로 방사선 치료를 하러 서울에 가신다 했다. 나는 아빠의 첫 방사선 치료를 함께해드리고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서울로 갔다. 전철을 타고 신촌역에서 내려 1번 출구를 따라 길게 늘어선 줄에 섰다. 잠시 후 병원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오랜만에 서울에 온 것이기에 아빠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설렜다.
지금까지 아빠는 간암과 폐암 모두를 겪었지만 다행히도 경과가 좋았다. 간암은 완치 판정까지 받았던 상황이었기에 나는 이 치료도 별수롭지 않게 여겼다. 치료만 잘 받으면 괜찮아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운이 좋아도 아주 좋은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는 실감하지 못했다. 아빠가 생활이 규칙적이고 산책도 정기적으로 하시고 좋은 음식 많이 먹고 마음이 편하게 살도록 엄마가 보살피니 당연한 귀결이라고만 생각했다. 운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 영향이 컸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근거 없는 낙관을 했다.
으리으리하게 큰 병원은 땅조차도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일류 대학 옆에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병원 본관 옆 암 병동 앞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깨끗하고 세련된 대리석 인테리어와 깔끔한 최신식 시스템은 이 병원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있는지 느껴지게 했다. 그 시스템을 우리도 이용하고 있지만 이 으리으리함은 나 같은 촌년을 주눅 들게 함이 있다. 살짝 소심해져 회전문을 계속 보며 서성였다.
키 160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왜소한 아빠가 회전문을 따라 어기적 어기적 들어왔다. 높은 천정에 으리으리하게 큰 병원에 들어온 아빠는 꼬마가 된 느낌이었다. 아빠는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빠는 겨울이었지만 추운 내색 없이 환히 웃고 계셨다. 엄마가 옷을 꽁꽁 싸매 주더라며 이야기하신다. 우리 가족 중 제일 좋은 브랜드 옷을 입으시는 아빠지만 그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나이가 보인다. 아빠 어깨에 올라온 먼지를 털어낸다. 복잡한 병원 구조에 방사선 치료실을 못 찾으셔서 내가 나서서 안내해드린다.
방사선 치료하는 곳으로 갔다. 아빠는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셨다. 아빠 손을 만져 보자 차가워져 있었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긴장한 것이리라. 입술도 바짝 마른 지 입가가 하얗게 보였다. 따뜻한 물을 떠다 드렸다. 물을 조금 마시고 기다리자 아빠를 호명한다. 아빠는 나에게 손인사를 하더니 쓱쓱 안으로 들어가셨다.
기다리며 방사선 표시가 되어있는 치료실 문을 보았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이 큰 병원이 어느샌가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음을 느꼈다. 로비는 3층이고 지하로 가려면 엘리베이터는 어디 걸 타야 하고, 식당가는 어디고, 암 병동은 어떻고, 입원실은 어떻고 등등... 이제는 이 으리으리하게 넓고 높은 광경이 낯설지가 않았다. 절대 익숙해지지 말아야 할 곳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고 나자 씁쓸해졌다.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내가 나이 든 만큼 부모님도 나이가 들었구나. 결국 한국에서 제일 큰 이 병원에 자주 오게 되는구나.'
아빠는 방사선 치료를 받고 나오셨다. 약간 창백해지셨지만 아무렇지 않다 하신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차갑다. 주물러 드리고 물을 드린다. 나는 애써 아빠에게 말을 걸고 물어본다. 어떻게 치료하는지 몇 번 남았는지 아프지는 않았는지 등등. 아빠는 재미있는 경험담인 듯 이야기해주신다. 머리에 동그란 무언갈 씌우며 그 근처를 기계가 돌아다닌다고. 말씀하시는 아빠의 얼굴에선 긴장했던 기색이 역력하다.
치료를 모두 마친 아빠를 배웅하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고 전철을 탔다. 아빠는 씩씩하게 앞장서 가셨지만 그 모습이 나는 아빠가 지금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친정집에 갈 버스표를 끊어 드리고 급하게 따뜻한 두유를 사서 아빠의 손에 들려드린다. 아빠를 버스에 태워드리고 버스가 차부를 떠나자 미소 짓던 내 입가가 내려앉는다. 어느덧 아빠는 자식들을 챙겨주는 게 아니라 챙김을 받는 대상이 되었구나 싶었다.
더 이상 예전의 아빠가 아니라는 자각과 앞으로 남은 방사선 치료에 대한 걱정. 그리고 여기저기 몸에 이상함을 느끼는 아빠의 상황이 앞으로 좋아질 일이 많지는 않겠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과 부모의 시간이 짧아져 감을 지켜만 봐야 하는 입장인 나는 마음에 서리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빠는 서서히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쇠락해져, 자식들의 챙김이 필요한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보호자가 아니라 보호자가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은 지 1년이 지난 후 아빠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엄마는 요양보호사 일에서 치매 관련 교육을 받았다. 아빠의 방사선 치료는 큰 효과가 없었다. 부작용으로 머리는 싹 빠졌지만 그만큼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뇌에 전이된 종양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는 소식에 기뻐함도 잠시, 아빠의 인지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아이가 되어갔다. 엄마가 없으면 안 되는 아이가. 아빠는 더 이상 혼자 병원에 가시지 못한다.
부모의 나이 듦을 지켜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삶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두드린다. 부모님은 남은 나날 중 오늘이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날일 것이다.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자식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부모님을 아프게 해 드린 만큼 나도 아프게 될까. 이렇게라도 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지. 이런 기회라도 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