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난 후 가장 돌봄 받지 못한 장녀가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평생을 타인에대한 돌봄으로 귀한 시간을 쓰고 있다. 이 건 참 아이러니고 억울한 일 아닌가. 다름 아니라 우리 엄마 이야기다.
1954년에 장녀로 태어나 계집이라고 학교 육성회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우리 엄마 명자씨. 이름도 참 성의 없이 지어 엄마는 이 이름을 싫어하시지만 밝게 빛나는 이름이기에 나는 좋아한다. 어쨌든 명자씨는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줄줄이 태어난 동생을 업어 돌보면서 설거지하며 부모를 도왔다. 어린 마음에 친구들 모두 단풍구경 가는 곳에 따라가겠다고 동생을 업고 팔꿈치 너머까지 젖은 소매 그대로 종종 쫓아갔던 명자씨. 돌아와서는 혼만 서럽게 났던 명자씨는 성인이 되어 때 구정물 가득한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한 장 찍으며 돈 없고 책임감도 없는 막내아들(아빠)에게 시집갔다.
시집간 후 서러운 일은 너무 많아서 다 쓰기 어려울 지경이다. 갓 난 아이를 낳은 명자 씨를 두고 할머니는 집 대문이 안 잠긴 것 같다며 돌아갔다거나, 셋째인 나를 낳고 보살펴줄 사람이 없어 아이 낳자마자 아이 씻기고 밥 해 먹는 일부터 전부 하는 바람에 몸이 뚱뚱 붓고 많이 아파서 허리가 펴지질 않았다거나. 상상도 하기 어려운 아픔 속에서 명자 씨의 남편, 아빠는 저 구석 한 모퉁이에만 있을 뿐이었다. 세상 풍파에 명자씨는 아이 셋 먹여 살리기가 녹록지 않았다. 임신했을 때 너무 배고파 국수를 불려먹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집안의 단골 사연이다.
그럼에도 우리 남매는 돈은 부족했을지언정 사랑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는 막내여서 특히 아빠의 사랑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빠는 어린 시절에도 우리를 위해 밥 수저 하나 도와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말이다. 그 역시도 엄마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가족끼리 무언가를 하려고 바쁜 와중에도 애를 썼으니 말이다.
결혼 전 꽃다운 시절 어린 동생들 돌보느라 시간 보내고, 결혼 후에는 아이 셋 돌보느라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최선을 다한 명자씨. 아이 셋이 다행스럽게 잘 결혼하고 자리도 잡았다. 노년에 접어들어 조금 편해지려는 찰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했다. 시골을 벗어나지 못한 명자씨가 할머니 댁과 가장 가까이 살았다. 아픈 부모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필요할 때 와주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명자씨는 전화 한 통에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병환은 심해지고 할아버지도 아팠다. 할머니는 결국 입원을 했고 명자씨는 40여 일간의 입원 간병을 했다. 태어난 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부모에게 돌봄 받은 것은 없다 해도 세상 하나뿐인 오로지 내 엄마니까. 할머니만큼은 제 손으로 돌봐드리고 싶다고 자처하시면서 간병을 시작하셨다. 그 당시 그래도 아빠는 엄마 힘들다고 집안일을 하면서 도왔다. 아빠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철이 드나 싶었다. 할머니가 생각보다 일찎 돌아가시면서 명자씨는 돌봄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그러다 아빠의 병이 시작됐다. 간암이 완치가 되자마자 폐암이 발견되었고, 폐암이 뇌까지 전이가 되었던 것. 그 전이된 암은 뇌에 고루 퍼져있어 방사선 치료도 감마나이프 치료도 먹히질 않았다. 결국 아빠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세상에 이처럼 고약한 병이 있을까.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병. 나만 잃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보살펴 주는 그 사람을 고갈시키는 병이 치매다. 그게 걸려버렸다. 그지같이 말이다. 하필 최악의 병이 찾아왔다. 명자씨는 남편 간병이 길어지면서부터는 운명을 탓하던 것도 멈춰버린 듯하다.
의사들도 이 정도면 요양병원에 보내셔야 한다 하고,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예전에 명자씨한테 엄청 잘해줬나 보다고 생각할 정도로 챙긴다. 하긴 폐암 발병 당시에도 뇌에 종양이 있었으니 4기였다. 그 후 5년 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흔한 확률은 아니다. 사망률 1위 폐암, 4기 5년 내 생존율 23퍼센트임에도 아빠는 여전히 살아있다. 명자씨는 암에 좋다는 것들과 건강식을 챙기고 좀 전에 이를 드러내며 화를 낸 남편이어도 돌아서면 챙기는 게 명자씨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대단하다 못해 숭고함을 느낀다. 아니 그 썩어 문드러진 속을 깨닫는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혈액순환을 위해 족욕기도 사고 치료용 장판도 사서 극진히 모신다. 그러나 그 족욕기는 한 두 번쓰고 끝났다. 아빠가 가만히 있질 못하니까. 살아생전 엄마에게 무임승차한 아빠 이건만 밉지도 않은 건지...... 말년까지 저렇게 사람 힘들게 한다고 원망도 할 법하건만, 엄마는 지금 아빠를 돌보는 일을 본인 인생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두렵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어떻게 되실지 상상만으로 두렵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하고 싶은 일 따위는 생각조차 안 하는 듯 하다. 그게 걱정된다. 홀로 남으신 후 살아갈 힘을 모두 지금 아빠에게 쏟는 것 같아서......
그런 명자씨도 몇 년 전 녹내장 판정을 받았다. 원래 약한 눈이었는데 포장마차를 하면서 가스불을 많이 쓰다 보니 더 나빠졌단다. 자식들 어떻게든 먹이고 교육시키려 제 몸을 혹사시키다가 얻은 병이다. 녹내장은 치료 방법이 없어서 관리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치매 걸린 남편 챙기다 보면 제 눈에 넣는 안약을 잊곤 한다. 그래서 얼마 전 핸드폰에 알람을 맞춰드리고 왔다.
기억이 드믄드믄 끊기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이 아빠에게 아내가 잘해주는 건 아느냐고 하면 "알지유~"라고 말하더란다. 아빠를 볼 때마다 나는 종종 "아빠는 복 많이 받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준다. 아시려나...... 명자씨를 얻어서 인생 거저 얻은 거, 아내의 돌봄 덕분에 더 오래 살고 손주도 보게 된 건 아시려나...... 그게 아빠의 복인 것은 알겠는데 그럼 엄마의 복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퍼주기만 하고 내 생명, 내 건강도 갉아내야 하는 것인가. 언젠가 엄마는 아빠를 세수시키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있지만, 당신이 가고 나면 나는 누가 있을까."
나는 그 말에 '엄마 내가 있잖아. 우리가 있잖아.'라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작고 야위어진 뒷모습에 목이 메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