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걸려든 그곳
총 280세대 아파텔 M의 평면 타입은 20개. 창문을 통해 녹색의 푸르름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점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대한민국에 평균적으로 퍼져있는 비슷비슷한 평면에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의 자유&해방감.
모델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내 마음에 일 순위로 들어온 평면 타입은 파노라마뷰를 가진 세모난 평면이었다. 네모반듯한 집을 선호하는 한국에서는 시도하기 힘든 디자인. 나는 시행사의 과감한 시도에 감탄하며, 단 8세대뿐이었던 이 평면을 청약 일 순위로 써내었고 운 좋게도 당첨이 되었다.
아파트로 치면 베란다 확장한 27~28평에 해당하는 면적에 방이 단 한 개뿐인 평면. 제한된 면적 안에 방 개수를 최대한 넣고 싶어 하는 한국인 특유의 욕심(?)을 배제한 매우 심플하고 이국적인 구조의 평면이다.
나는 이 평면이 좋았기에 계약 후 여기저기에 위의 평면도를 보여주며 의견을 들었다. 다음은 내가 들은 의견들.
*해당 지역 부동산 중개업소 세 곳(보수적이며 변화의 흐름에 둔감/50~60대 남성들)
: 이런 특이한 평면을 왜 받았습니까? 심지어 여기 들어가 사실 거라고요? feat. 정말로 의아한 눈빛
*타 지역 부동산 중개업소 세 곳(변화의 흐름에 민감하게 적응하는 곳/40~50대 여성, 남성, 여성)
: 저도 들어가 살아보고 싶어요. / 우리나라는 무조건 네모난 집을 선호한다구요. / 젊은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겠어요!
*뉴욕에서 MBA 졸업하고 10년간 해외에서 일하다 귀국해 한남동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싱글녀 E(40대)
: 야! 여러 평면들 중에 나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 (아파텔 M이 위치한) 이 지역에 방 한두 개 있는 평면 원하는 수요 엄청 많아. 1~2인 가구로 시크한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젊은 사람들. 그리고 외국에서 살아본 젊은 사람들. 나도 그 지역에서 일할 때 이런 집 찾으러 다녔었어.
*강남구 소형 아파트에 혼자 사는 멋쟁이 싱글남 S(30대)
: 아~너무 멋져요! 돈 여유되면 사고 싶어요. feat. 반짝이는 눈
*매사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차분한 서초동 사모님 H(50대)
: 매력 있는 평면이야. 젊은 여자들이 훅 빠질 것 같아.
*미술을 전공한 기혼녀 E(40대)
: 진짜 멋지다. 부러워! 이사하면 꼭 초대해줘.
*시공사 현장 담당자 C(30대)
: 매일 아침 전체 세대를 돌아보는데, 이 타입에서 보이는 뷰가 가장 좋아요. feat 수줍은 말투
종합하면 이 평면 타입에 대해 좋은 의견이 더 많았다. 시대가, 사람들의 관점이 변화하고 있다.
전문가의 의견도 궁금했다. 친절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온 젊은 건축가 한 분(40대 남성)을 만나 물어보았다. 곱슬머리, 둥근 안경테, 담백한 말투의 이분이 들려준 의견 중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
- 건축가: 이 평면 타입은 싱글남이 동생들 부르기 좋은 집이네요.
- 나: 네?(남자 동생들 불러 술 퍼마시며 파티하기 좋은 집이라는 의미인가?)
- 건축가: 여자 동생들... 여자들 유혹하기 좋은 바람둥이집이예요.”
- 나: 네?!
순간 무의식적으로 이 타입에 끌린 나도 혹시 바람둥이인가(여자이지만)라는 자기성찰을 잠시 하고... 나는 누구를 불러야 하나(결론: 부를 남자 동생들 없음, 친남동생도 올까 말까임)하는 상상도 잠시 하고... 그러고 나서는 ‘바람둥이집'이라는 건축가분의 통찰력과 표현이 재미있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건축가분을 만나고 정확히 이틀 뒤, 부동산중개업소에 내놓지도 않은 이 집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시행사를 통해 받았다. 해당 중개업소 사장님을 통해 파악한 상대의 프로필은 40대 초반의 싱글남. 매우 준수한 용모의 부유한 사업가란다.
순간 나는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건축가분의 신기(superhuman ability)에 가까운 안목이 놀라웠고 이 우연의 일치가 너무 재미있었다. 며칠간 운명 인가 하며 이 싱글남에게 세를 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우선은 이 집에 들어가 살고 싶은 나의 욕구를 존중하기로 했다.
참고로 40대의 기혼남 H는 ‘바람둥이집'이라는 표현이 엄청난 칭찬이라는 의견을 들려주었다. 집은 여자가 선택하는 물건이기에, 여자들이 한눈에 반할 정도의 집이라는 건 집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건축가분의 담담한 눈빛과 말투를 떠올려봤을 때 이 표현이 칭찬이이었는지의 여부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는 해석을 할 거니까, 이제 ‘칭찬'이다. :)
그러고 보니 나도 한눈에 반했다. 이 평면 타입. 여자를 유혹하는 집 맞네.
*파노라마(panorama)
: 야외 높은 곳에서 실지로 사방을 전망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사생적 그림을 건물 안에 장치한 것. 건물 내벽에 둥글게 그림을 걸고, 그림의 앞면에는 그림 속의 형상에 융합하는 가설물을 설치하여 관람자에게 마치 실경(實景)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네이버 국어사전)
: 네덜란드에 살 때 헤이그에 있는 파노라마 ‘Panorama Mesdag’를 두세 번 보러 갔었다. 현장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가 없던 시절, 파노라마는 사람들에게 꽤 큰 놀라움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그 무언가였다고 한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면 panorama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