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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흥만 May 07. 2020

영어 못했던 미해결과제를 해결한
프리츠 펄스 이야기.

게슈탈트 심리치료

먼저 간단하게 프리츠 펄스(Fritz Perls)의 생애는 이렇다. 펄스는 한마디로 독일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였다. 그는 1893년 베를린의 유대인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엘사와 그레트라는 누나가 둘 있었다. 그의 아버지 네이든은 와인 판매원이었다. 그의 어머니 아말리아는 빈민 가정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펄스에게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남겨주었다.  


펄스는 반유대정서가 엄격한 곳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펄스는 그 학교에서 13세에 쫓겨났다. 펄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중적 잣대를 가진 위선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의학공부를 시작한 그는 1차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십자에 자원봉사자로 가입했다.


이어 1920년에 프리츠 펄스는 독일의 베를린 프레드릭 빌헬름 대학에서 의사면허를 받았다. 그는 그 이후 심리신경 심리학을 공부했고, 철학자 프리드랜더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평생에 걸쳐 펄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23년 그는 뉴욕에 가기로 결심하지만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의사 면허 유효화에 거절 받는다. 좌절한 그는 독일에서 정신분석에 심치하고, 그 공부그룹에서 아내 로라 펄스를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들이 혼인할 때의 나이는 펄스가 36세, 로라가 24세였다. 띠동갑의 능력이는 펄스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는 비엔나에서 정신분석가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1928년 전임 정신분석 치료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유대인 탄압을 시작한 히틀러정부를 피해 네덜라드를 거쳐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아내 로라와 함께  남아프리카정신분석협회를 설립했다. 


 1936년, 펄스에게 다시 기회가 왔고, 프라하의 한 회의에 초대되었지만, 펄스가 말한 이론들은 정신분석학회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전통적 정신분석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1942년 그는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정신분석과는 차이를 둔 새로운 이론인 게슈탈트치료를 세상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1952년 그는 '게슈탈트 요법 : 흥분 그리고 인간 성격의 성장'을 출판한다. 이 책은 시인의 도움으로 탄생하였고, 게슈탈트 심리학, 정신분석, 현상학, 실존주의 그리고 미국의 실용주의, 일본불교의 개념까지 추가시킨다.

게슈탈트 치료의 이면은 복잡했다. 1956년 펄스는 로라와 이혼하고 말년에는 치료사보다는 구루(Guru)처럼 행동했으며, 여행을 좋아한 펄스는 만년에 긴 여행 끝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게슈탈트 요법은 한마디로 환자들이 경험하는 것보다 그들이 현실을 경험하는 데에 초점을 더 맞춘다.

'이는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보다 그 한 사람이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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