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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Aug 13. 2017

왜 한국은 친일청산을 못했을까?

프랑스와 한국의 차이

광복절이 눈앞입니다. 광복절은 해마다 돌아오고 있지만 우리는 과연 해방된 조국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흔적은 70년이 지난 현재도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친일청산 이야기가 나오면 꼭 나오는 것이 2차대전 후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연상시킬만큼 철저한 처벌로 나치에 부역했던 이들을 청소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해방 후 조선은 친일 부역자들을 거의 처벌하지 못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헬조선이라는 것이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것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뼈아픈 순간으로 꼽힙니다. 그들로부터 시작된 부패와 정경유착, 반자주적 행태, 권위주의적 문화 등은 대한민국의 건강한 발전에 여전히 해악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후 프랑스는 200만명 이상의 부역자를 기소하여 이 중 99만명이 재판을 받았고 6,700여명이 사형, 26,000여명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은 사람들도 가혹한 여론의 뭇매를 받았습니다. 일례로 독일군과 잠자리를 한 여성들은 강제로 삭발당한 뒤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죠.

당시 프랑스에서도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는 여론이 있었습니다만, 프랑스인들은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희망을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일(알베르 카뮈)'이라며 숙청을 강행했죠.  그 결과 프랑스인들은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 다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샤를 드 골)'이라 자신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48년 친일부역자들을 색출해서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열렸으나 흐지부지되었고 그나마 거론되었던 인물들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하며 처벌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한국의 역사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들의 연속입니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므로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프랑스와 조선의 선택은 많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와 조선의 선택이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두 나라의 수준차이, 국민들의 의식차이일까요? 프랑스는 개명한 선진국이어서 나치부역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고 조선은 미개해서 친일파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나라가 된 것일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답은 제가 누차 말씀드리고 있는 '진화론적 인식론'의 결과입니다. 조선인이 미개해서 친일청산을 못했다는 얘기는 조선인이 미개해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과 정확히 같은 뜻입니다. 


결국 조선인(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런 생각으로는 앞으로도 친일청산은 불가능할 겁니다. 


우리가 친일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것은 첫째, 그들에게 우리 사회의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이 친일을 청산하지 못해서 그들이 권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친일 부역자들에게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권력을 친일 청산에 쓰지 않은 것이죠. 


미 군정과 이승만

애초에 친일 부역자들이 해방 이후 조선의 권력을 쥐게 된 과정을 살펴봅시다. 1948년 반민특위가 열렸을 때, 김구 주석을 비롯한 많은 독립투사들은 강력한 부역자 처단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방해한 것은 이승만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 가장 기반이 약하고 평판도 그닥 좋지 않았던 이승만은 권력을 잡기 위해 친일 부역자 세력을 적극 이용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럴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고 남아있는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북위 38도 선을 기준으로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들어와 있었는데요.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조선인들이 미개하여 정부를 세우고 나라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공백이 된 조선의 치안과 행정을 일제시대에 그 일을 하던 이들에게 맡겨버립니다. 오로지 편의를 위해 말이죠.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하지 중장

군대, 경찰, 사법, 행정, 공무원 등 사회의 주요 요직이 친일 부역자들로 채워진 것입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등을 무대로 활동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 근거지를 두었던 이승만은 하지의 군정에 적극 협조하면서 친일 부역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당연히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친일 부역자들은 미 군정과 이승만이야말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였을 겁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친일 부역자들이 필요했던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결국 해체시킵니다. 


친일청산을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지 않는 이들과의 세력 차이는 너무나 엄청났습니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친일청산의 요구를 조직적으로 방해했고, 나중에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까지 공산당, 빨갱이로 몰아서 고문하고 죽이고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곧이어 벌어진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역사도 친일청산을 원하는 이들보다는 원하지 않는 이들이 권력을 쥐고 행사해 온 시간들입니다. 2006년 60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친일청산법이 다시 발의되었을 때 반대표를 던져 법안 통과를 막은 국회의원들은 누구입니까.


위안부 강제동원 등 일제의 만행을 부정하고 일제시대를 미화하며 조선인(한국인)들의 미개함을 부르짖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곳곳을 장악해 왔는데 광복 직후의 조선에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조선인들의 탓일까요?



친일 청산이 어려웠던 두 번째 이유는 일제 강점기가 지속된 기간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심리적 변화 때문이지요.


4년 vs 35년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두 나라가 각각 독일과 일본에 점령당한 기간입니다. 나치는 1940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25일까지 4년 2개월동안 프랑스를 점령했고, 일본은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35년동안 한국을 지배했습니다.


4년과 35년의 차이가 의미하는 것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일단 산술적으로도 35년은 4년의 (거의) 9배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구요.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36년은 한 세대(25~30년)보다도 긴 시간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 어른이 되고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시간이죠.


저는 친일파를 옹호하거나 앞으로도 친일청산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35년이라는 시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일제강점기가 4년만에, 아니 10년만에만 끝났으면 조선도 프랑스 못지 않은 친일파 처벌을 했을 겁니다. 


조선인들은 한편으로 눈물나게 저항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주어진 조건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을 겁니다.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쓰고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서 서른 살이 넘도록 말입니다. 그 세월동안 이 땅에서 먹고 살려면 독립과 순응 중 어떤 태도가 더 유리했을까요?

1940년 영암소학교 수업장면 (출처, 영암신문)

문화란, 가치란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살기 위해 해야만 했던 많은 행동들은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점차 정당화되었고 이 나라의 가치와 문화가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도 견디고 이겨낼 강인한 생존력을 얻었으나 자주독립이나 사회정의 같은 것은 눈 앞의 밥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끝까지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지사들은 진정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고도 남을 35년이라는 시간은 상당수의 조선인들에게 독립만 꿈꾸며 버텨내기에는 너무도 긴 세월이었습니다.


더구나 프랑스 점령 후 4년만에 패망한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병한 이후 태평양전쟁(1941년)을 일으키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꽤나 승승장구했습니다. 당대 조선 최고의 천재이자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육당 최남선 같은 인물도 일본의 지배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말이죠.


대다수의 조선인들도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오랜 시간동안 익숙해진, 그리고 정당화된 태도와 가치관들은 해방 후 적극적인 친일파 처단에 제동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거 친일청산법이 논의될 때, 우리 주변의 많은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 때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어? 먹고 살려니까 다 맞춰주고 한 거지" "이제 와서 친일청산이라니 억울하게 피해 볼 사람이 많을 거라고" 이런 등등의 생각을 할 수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36년의 시간과 그 동안의 심리적 변화들을 고려했을 때 말이죠.



하지만 친일청산은 친일파 후손의 재산을 환수하고 사회의 권력과 요직을 차지한 부역자 자손들을 갈아치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갈 나라의 미래를 위한 바른 가치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우리 스스로가 능력없고 미개한 존재라는 인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친일청산은 대한민국이 저따위의 자학적인 자기인식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갖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우선 필요합니다. 


또 하나 친일청산이 필요한 이유는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가장 쉽고도 단순한 가치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질곡의 현대사를 빠져나오며 먹고 사는 것에 최우선순위를 둔 나머지 법을 지키며 성실하게 사는 이들을 바보 취급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나라는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따위의 말이 더이상 들려오지 않는 나라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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