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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Sep 13. 2024

한중일 유행어 변천사

헬조선에서 원영적 사고까지


최근 '원영적 사고'라는 밈이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원영적 사고란 걸그룹 아이브 멤버인 장원영 씨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인데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입장에서 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이후 원영적 사고는 방송인 유병재 씨를 비롯 여러 인플루언서들에 의해 재생산되면서 한동안 인터넷을 달구었었는데요. 저는 최근 청년들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이 매우 긍정적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도 한국에는 헬조선, 흙수저, N포 세대 등의 자조적이고 부정적인 유행어가 넘쳐났었거든요. 청년들의 마음에는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유행어는 시대와 문화를 반영합니다. 헬조선과 N포 세대 논란에는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포기하는 청년들의 좌절이 담겨 있었습니다. 실제로 N포 세대 밈이 가득했던 2010년대 초 중반 이후 결혼율과 출생율이 급감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원영적 사고에서는 현실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청년들의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그동안의 뿌리 깊은 좌절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삶을 대하는 자세의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헬조선과 흙수저, N포세대 등의 유행어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기는 201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그 이전 2000년대 중 후반까지 한국에서 유행했던 말에는 '웰빙'이 있습니다. 좀더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한 열풍이었죠. 특정 밈의 유행에는 분명 시대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세계 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전쟁에 이은 평화에 대한 기대로 출생율도 엄청나게 증가했었고(베이비 붐), 전후 복구 사업부터 지금 현대인들의 삶의 표준이 된 전기,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는 등 희망의 시대였죠.


지금도 그 시대(1980년대)의 사진들을 보면 물질적 풍요 속에 다양한 문화가 꽃피던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이 이 시대를 선도했었고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일본은 전자 및 자동차 산업을 바탕으로 1980년대를 말 그대로 휩쓸었고 이 시기 일본의 경제는 '버블경제'로 불릴 만큼 부풀어 올랐죠.

버블경제 시절 일본

빠르게 산업화를 성공한 한국도 이 분위기를 탑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국민들의 삶에도 꿈과 희망이 가득했었죠. TV, 냉장고, 자가용, 삼겹살... 조금씩 늘어가는 살림에 사람들의 얼굴도 피어나던 시대였습니다. 분단, 북한과의 대립, 군사정권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90년대에는 산업이 컴퓨터 및 IT로 전환되면서 세계 경제는 다시 한번 도약의 계기를 맞습니다. 삶의 배경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대였죠. 컴퓨터와 인터넷, 핸드폰이 보급되면서 관련 산업들이 크게 성장했죠.  IMF와 금융위기를 겪긴 했지만 T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벤쳐 열풍 등 새롭게 부상하는 산업들로 미래는 여전히 밝아 보였습니다.

그냥 어떻게든 될 거 같았던 시절

계속 성장만 할 것 같았던 세계 경제는 1990년대 말부터 정체기를 겪게 됩니다.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유럽부터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일본의 버블이 꺼지고 잃어버린 N십년이 시작됩니다. 청년 세대의 좌절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영국을 필두로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 나타났고 일본에도 일체의 사회활동을 포기하고 집에서 나오지 않는 이른바 히키코모리들이 등장합니다.


한국도 1997년 IMF와 2000년대 초반 금융위기 이후, 고용이 급격히 불안정해졌고 세계화로 주요 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양극화 또한 심해졌죠. 양질의 일자리가 줄고 취업이 점점 어려워지던 2010년대부터 헬조선, 흙수저, N포세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후로 몇년 동안은 OO충, 남녀갈등, 세대갈등, 온갖 혐오와 갈등이 불거져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현 시대에 청년 세대의 좌절은 한국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금수저, 은수저 하는 흙수저론 자체가 'be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는 영어 표현에서 왔구요. 일본에도 오야가챠(부모 뽑기), 중국에도 푸얼다이 vs 핀얼다이(부자 2대vs 가난 2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한중일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1990년대부터 이민자에 대한 혐오(제노포비아)를 드러내며 극우 정당들이 준동하는 유럽과 총기사고 및 총기사망율 1위의 미국의 현실이 의미하는 바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의 출생율은 우리보다 더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죠.


하지만 그 모습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현실과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는 방식은 자신들의 문화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남녀, 세대, 빈부 등 좌충우돌하는 한국과 자쿠단(弱男), 카타오야빵(片親パン)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는 일본, 소분홍(少分紅) 등 외국(주로 한국)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중국, 진화론적 인종차별로 드러나는 유럽과 총기를 난사하는 미국의 모습은 각각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등장한 원영적 사고는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갈등에 지친 청년들이 스스로의 삶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일까요.


작금의 현실은 어느 한 나라만의 상황이 아닌 세계 보편적 흐름입니다. 내가 누렸어야 할 부와 성공을 나 아닌 누군가가 누리고 있다는 인식으로는 본질적 문제해결에 다가갈 수 없을 뿐더라 나의 삶 또한 개선될 리 만무하죠.


어려운 경제상황, 변화하는 산업구조, 눈앞으로 닥쳐온 기후위기, 불안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서 원영적 사고는 통제 불가능한 외부적 상황보다 통제 가능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인지의 변화이며, 삶의 의미를 스스로에게서 찾는 실존적 존재 양식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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