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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스펙트럼상의 사람이 친구일 때와 배우자일 때

아스퍼거 배우자

by 코리아코알라

감자튀김을 마지막으로 먹은 날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나는 감튀를 안 먹는다. 안 좋아한다기보다 몸에 가장 나쁜 음식 중 하나라는데 굳이 먹지 않아도 괜찮아서다. 하지만 감튀를 불안이나 우울증이 있는 지인들이 강박적으로 좋아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몇 번 있다.


오늘 외출했다 귀가하는데 갑자기 감튀가 떠올랐다. 오늘은 반드시 감튀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몇 년 만에 버거킹에 가서 감튀 라지와 커피를 한 잔 시키고 한 시간 동안 혼자 감튀를 케첩에 쳐발쳐발 먹었다.


나는 신경다양성 중에서도 자폐와 관련된 책들, 특히 표시가 나지 않는 고기능자폐라고도 불리는 아스퍼거와 관련한 책들을 꾸준히 읽는다. 그중 한 권은 외출할 때마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으로 읽는 전자책인데 오늘은 정말 시궁창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왜, 다 맞는 말인 거 알지만 정말 귀를 틀어막고 듣고 싶지 않을 때, 사실이지만 너무 불공정하고 불공평하고 부당하다 느껴질 때 있지 않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작은 400페이지 가까운 그 전자책이 아니라 어젯밤에 읽던 '아스퍼걸'이란 책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스퍼거는 워낙에 표시가 안 나서 본인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특히 여성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은 그런 여성들을 위해 쓴 책이다. 책을 쓴 이는 정말 멋진 남자 친구가 있는데 그는 자폐에 대해 계속 더 배우려고 책을 읽고 노력한다고 했다. 물론 그녀는 그가 그러기를 먼저 요구했다고 했다. 아스퍼거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행동하면 자폐가 없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불편해한다. 그러니 아스퍼거인들은 평생을 전형인의 사회에 맞춰서 살아가야 하니 너무나도 피곤한 삶일 것이다. 따라서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를 알기 위해 노력함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오늘 읽은 책도 (사실 어제의 책과 오늘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많아 어떤 내용이 어제의 것이고 오늘의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뭐 이건 북리뷰는 아니니까) 같은 얘기를 시종일관했다.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관계를 유지하지 마라. 자신의 본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라. 숨기지 마라. 전형인이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반응해 봐라. 가령, 온몸을 자극하는 양복대신 편한 옷을 입고, 잘 알아듣지 못하면 자폐가 있어서 그러니 다시 쉽게 설명해 달라 요구하고, 소리가 너무 커서 스트레스 레벨이 올라가면 볼륨을 줄여달라 하고, 조명이 시각을 너무 자극해서 머리가 아프면 조명을 바꿔달라 직장에 요구하고, 너무 차갑거나 무례해 보인다고 지적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시하고, 어떻게 지내냐는 (형식적인) 질문에 가감 없이 솔직하게 대답하고,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 보고... 대략 이런 내용을 이틀에 걸쳐 수십 장을 읽다가 오늘 지하철에서 갑자기 더 이상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북받쳐 올랐다.


제발, 그만!!!!!!!!!!!!!!!!!!!!!!!!!


정말 도가 지나치는 거 아닌가?? 자폐가 없는 사람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가면을 쓰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약속을 지키며 사는 것이 힘든 것은 알겠다. 만약 내 친구가 자폐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노력해서 그 친구를 이해하고 친구가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가 나와 365일, 24시간을 같이 하는 날이 많은 배우자라면?


그가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지 않도록 최대한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아무리 내가 가고 싶은 파티, 공연, 시장, 축제, 커피숖, 관광지 등이 있더라도 포기하거나 혼자 가면서), 특정 음식을 이유 없이 거부해도 이해하고, 병원에 갈 때는 그게 진료를 보기 위해서든 서류를 떼기 위해서든 결과를 듣기 위해서든 (그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것이므로) 서로의 (특히 내) 감정이 지옥에 떨어질 만반의 준비를 하고, 불안감이 몰려오면 무섭도록 차갑거나 무표정이 되는 그를 이해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그의 뭉친 감정을 풀어주려 노력하고, (특히 불안하거나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경우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항상 내 앞에서 혼자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로워하지 않아야 하고, 한 가지 규칙을 가르쳐주면 전혀 융통성 없이 모든 상황에 대입하여 지키려는 그를 보며 한숨 쉬지 않고 감사해야 하며, 아무리 바빠도 혼자서 (눈의 감각이 너무 예민하여) 안약도 넣지 못하는 그를 위해 시간 맞춰 안약을 넣어주고, 안약이 너무 아프다며 호들갑?을 떠는 그를 진정시켜 주고... 저녁이 되면 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전날 읽던 자폐와 관련한 서적들을 다시 이어 읽는 일상 속에서 나도 가끔은 '아, 이제 그만 노력하고 싶다. 그만 배려하고 싶다. 나도 좀 이기적으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이해하며 함께 사는 이유는 그도 그 나름대로 노력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를 괴롭히는 그의 표정, 행동, 어투가 대부분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도 꾸준히 의사소통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 같다고 느껴서다. 그 속도는 물론 어느 정도냐면, 어느 자폐아이를 키우는 맘의 말을 빌리자면 "예전에는 엄마라는 말도 못 해서 제발 엄마라고 한 번만 불러주기를 소원했는데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엄마하고 불러서 그만 불러라고 한다."에 비할 정도다. 물론, 그날그날 불안의 정도에 따라 퇴행은 수시로 반복된다.


내가 난독증과 거의 드러나지 않는 자폐인 아스퍼거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에 이 두 가지 모두 아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다. 난독증이나 아스퍼거나 둘 다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님은 알겠다. 하지만 다양한 난독증 중 특히 ADHD가 함께 있는 사람에게 문자로 선형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엄청난 인내가 필요함도 인정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스퍼거가 있는 사람에게 무척 많은 강점이 있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친구 중에 아스퍼거를 가진 이가 있다면 나는 최고의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강점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할 것 같다. 하지만 배우자라면... 솔직히... 쉽지 않다, 전혀! 나는 매일매일 마음을 수련하고 도를 닦는다는 생각으로 살 지경이니까.


시중에 나와있는 아스퍼거에 관한 많은 책들은 아스퍼거인들이 쓴 게 많아서 너무 편향되어 있다. 그게 아니면 부정적인 면만 부각되어 있는 상담사의 글 모음도 있긴 하지만. 왜 중간쯤 지점에서 쓴 책은 없는가? 사실 그러기가 절대 쉽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척 인내심이 많고, 생각이 유연하며, 끊임없이 배우려는 (나 같은) 배우자이거나 무수히 충돌하면서 끝내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그나저나 왜 감튀가 내게는 별 효과가 없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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