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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18. 2019

#26. 청국장 끓이는 밤

왕언니표 청국장


사찰요리 수업에는 전국 각지의 스님들이 강의하러 오신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전국의 요리 비법을 서울 도한복판에서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지난여름에는 대전에서 올라오신 한 스님강의 끝에 "매년 가을우리 절에서 사찰요리 축제를 합니다. 서른 가지도 넘는 다양한 음식이 있으니 맛보러 오세요."하고 말씀하셨다. 서른 가지도 넘는 사찰요리가 한 자리에? 배스킨라빈스 31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이렇게 유혹적이진 않았다. 다이어리에 시뻘건 동그라미를 그려두었다.


오이냉국과 수박 김치, 깻잎장아찌로 여름을 보내고 어느덧 시월, 함께 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언니들과 대전으로 떠났다. 괌에서 돌아온 지 만 하루가 안되어 새벽 기차에 몸을 싣고 대전으로 가고 있다니, 시차랄 것도 없지만 시차보다 몸이 적응해야 될 것은 식(食)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팁으로 받은 청국장

"고객님들, 여기서 우회전하실게요!"

"고객님들, 여기서 내려서 환승하실게요!"

"어린 네가 인도하거라" 왕언니의 한마디에 기차표 예매부터 가이드까지 맡은 이번 여행. 절이 도심 안에 있어 딱히 가이드랄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언니들은 유치원 아이들처럼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일찍 출발한 바람에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축제 준비로 절이 한창 분주한 가운데, 입구에서 참기름과 말린 나물 같은 것들을 팔고 있었다. 우리의 눈이 빛났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가장 빨리 쓸어 담는다.


기름만 보면 사고 싶은 나는, 얼마전 새로 산 들기름이 있으면서도 일단 들기름을 샀다. 들기름 병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만 액체는 칡 조청이라고 했다. 다섯 병 밖에 없다는 말에 우리 모두 한 병씩 집어 들었다. 왜 한정판 이란 말 앞에서만 서면 이토록 작아지는지(조청도 집에 두 병이나 있다). 이만 손을 털까 했는데, 왕언니의 손은 어느새 건나물 더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토란대, 건고사리, 취나물... 나도 옆에서 어정거리다 취나물을 한 봉지 샀다(역시 집에 있다). 왕언니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청국장이었다. 가격도 착해, 세 개 오천 원! 다들 청국장을 세 개씩 집었다. 집에서 끓인 청국장이 밖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었던 기억이 없어서 사지 않았는데, 언니들이 가이드 팁이라며 내게 청국장을 하나씩 건넸다. 동글납작하게 빚은 청국장을 받아 드니, 화폐 시대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달까.


잠시 뒤, 축제의 시작과 함께 커다란 접시마다 가득 담긴 음식이 긴 테이블에 나란히 진열되었다. 스님이 자랑했던 각종 부각을 시작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메뉴들이 많았지만, 정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아까 우리가 한바탕 쇼핑을 마친 절 입구에서 청국장을 박스째 쓸어 담는 어떤 아저씨의 모습. 뭐지? 이 위기감은. 그 모습을 본 언니들도 '청국장을 너무 조금 산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가서 더 사야 되는 거 아니냐' 하고 덩달아 초조해했다. 뛰어간들 이미 아저씨가 죄다 담아버려서 살 수도 없었지만.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서울로 돌아온 늦은 밤, 카톡방이 보글거렸다. 손맛 좋은 왕언니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 동영상을 투척한 것.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청국장 맛있게 끓이는 비법 몇 가지를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끓고 있는 청국장이 더욱 맛깔스럽게 보였다. 못 참겠다는 울부짖음과 함께, 청국장을 끓이고 있다는 언니들의 고백이 이어졌다. 점심때 두둑하게 먹었겠다, 돌아오는 길에 팥빙수며 빵이며 떡까지 잔뜩 먹은 터라 저녁만큼은 양심적으로 사양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도 냄비에 불을 올렸다. 왕언니가 알려준 청국장 맛있게 끓이는 법은 다음과 같다.


1. 쌀뜨물을 써라.

2. 물을 끓일 때, 무도 나박 썰어서 같이 넣어라.

3. 청국장은 쪼개지 말고, 한 덩어리를 통째로 다 넣어라. 안 짜다.

4. 묵은지가 생명이다. 묵은지를 한번 물에 씻어서 불 끄기 전에 넣어라.


불 앞에 서서 한 숟갈 맛본 청국장의 맛이란. 왜 그동안 아무도 내게 청국장 제대로 끓이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걸까. 비법이랄 것도 없어서? 너무 간단해서? 박스째 청국장을 쓸어간 아저씨를 이해할 수 있었다. 축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스님이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많은 음식을 준비했지만, 사실 우리 절 시그니처는 이게 아니야. 다음에 된장이나 한 그릇 하러 와요. 그게 진짜니까."

화려한 음식으로 유혹했지만, 사실 장맛을 알려주고 싶었던 스님의 빅피처였던 걸까. 된장찌개 먹으러 오라고 하셨으면, 새벽 네시에 번쩍 일어나 졸린 눈으로 기차에 몸을 싣진 않았을 테니. 서른몇 가지의 사찰요리보다 청국장이 그리워 내년에도 대전으로 갈 판이다. 그때는 나도 박스째 쓸어 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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