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일러킴 Apr 16. 2021

멀티태스킹 포기하기

한 번에 한 가지만

 20년 넘게 운전을 했지만, 낯선 나라에서 운전대를 잡으니 다시 초보운전자가 된 것 같다. 

 캐나다에서 운전을 하려면 몇 가지 유의사항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교차로의 ‘STOP: 4-WAY’ 표시판이다.  ‘STOP: 4-WAY’ 표시판이 있는 교차로는 일단정지 후 순서대로 한 대씩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다. 사방에 차 한 대 없어도 무조건 멈췄다가 3초 후에 출발해야 한다. 


STOP 표지판이 있으면 무조건 멈춰야 한다.


 오늘 아침 일이다. 

 아이들을 차로 등교시키고 마트에 들러 간단한 식재료를 구입했다.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착하자마자 해치워야 할 집안일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손은 핸들을 잡고 있지만 영혼은 벌써 냉장고 정리 후 집안 청소 중이었다. 그러다가 ‘STOP: 4-WAY’ 표지판 교차로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무심결에 앞차를 따라간 것이다. 가로방향에서 달려오는 차가 급정거 후 클랙슨을 울렸다. 사고가 날 뻔했던 순간, 앞이 컴컴했다. 가로방향 운전자에게 손을 들어 미안함을 표시했다. 아차, 싶었다.


 한국에서 운전을 할 때는 도로에 뿌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팟캐스트를 듣거나, 이어폰을 꽂고 친구와 통화를 하거나,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야 한다. 운전할 때는 오직 운전만 해야 한다.     


 멀티태스킹, 즉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다중작업 능력은 바쁜 현대인들의 업무 효율성과 능률을 상징하는 필수 덕목이다. 나 역시 멀티태스킹을 즐겼다. 난이도, 진행시간, 분량, 공통분모 등으로 업무를 분류한 후 바인딩하고, 중요도에 따라 바인더 별로 순차적으로 해결하면 뿌듯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고집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믿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이런 생각과 행동 패턴은 환영을 받았다. 상사들은 빠른 업무 진행을 선호했다. 물론 완성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100점 만점을 위해 시간을 지체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 책상 위에는 처리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서류가 넘친다.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면 과감하게 넘길 줄도 알아야 했다. 회사 일을 장인 정신으로 접근했다가는 조직 전체가 괴로워진다.     


 워킹맘이 된 후에는 멀티태스킹 능력은 극대화되었다. 직장생활과 가사노동, 육아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운 좋게도 ‘친정 엄마 찬스’가 있었기에, 그 어려운 걸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발 동동 구르며 캐나다에 오게 되었다. 더 이상 조급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데 일 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오래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이 조급했다. 하다못해 집안일할 때조차도 멀티태스킹의 강박에 사로 잡혔다.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하고, 빨래 돌리고, 삼시 세 끼를 차리고 치우면, 하루가 갔다. 집안일을 할 때는 유튜브로 강의를 시청하거나, 팟캐스트를 들어야 성에 찼다. 그렇게라도 해야 시간을 버는 느낌이 들었다. 가뜩이나 살림도 서툰데 동시에 두 가지를 하려니 요리도, 청소도, 빨래 정리도 엉망이었다. 하루 24시간, 365일, 널린 것이 시간인데, 누구에게 쫓기는 것처럼 여유가 없었다.      


 ‘STOP: 4-WAY’ 표지판 교차로에서 식겁하고 나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실은 얼마 전에 프라이팬 위에 기름을 두르고 불을 올린 것을 깜빡하여 온 집안을 홀랑 태워 먹을 뻔했던 터였다. 

사실 요리를 하거나 빨래를 갤 때 강의를 들어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니다. 그저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는 자기만족뿐이다.     


설거지를 할 때에는 설거지만 해야 합니다. 
설거지를 할 때에 자기가 설거지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이에요. 
내 숨을 따라,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과 내 생각, 내 행동을 죄다 알아차림으로써 완전하게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면 물결 위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병처럼 생각 없이 떠밀려 다닐 리 없겠지요.     

- ‘틱낫한 명상’ 중에서 -
     

 한 번에 한 가지만 집중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에너지도 많이 소모된다. 

틱낫한 스님은 그의 저서 ‘틱낫한 명상’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뒤에 차 마실 일을 생각하느라 마치 성가신 일을 처리하듯 서둘러 그릇을 씻는다면, 이따가 차도 제대로 마실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정작 차를 마실 때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테니까. 

 인간은 대게 어제의 기억과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서 헤매느라고 삶의 한 순간도 알차게 살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의 멀티태스킹은 ‘지금 이 순간’을 직면하지 못하여 실체 없는 과거와 미래를 부초처럼 둥둥 생각이 떠다니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몸에 오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보려 한다. 

거창한 ‘마음 챙김 훈련’까지는 어렵겠지만, 소소한 일상에서 실천해봐야겠다. 


 밥을 먹을 때는 천천히 꼭꼭 씹으며 혀의 움직임과 맛을 음미하고, 길을 걸을 때는 뒤꿈치부터 시작하여 발바닥 전체가 대지에 닿는 것을 온전하게 느끼고, 숨을 쉴 때는 들이쉬고 내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겠다. 


 모든 행동이 그대로의 하나의 의식이고 예식일 수 있도록 모든 동작들을 의식적으로 평소보다 1.5배쯤 느리게 움직이는 훈련을 해보고 싶다.


한 번에 한 가지씩. 

매거진의 이전글 피드백은 따끔하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