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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ventud May 15. 2016

당신이 있던 풍경, 제주

누군가의 사진에 담기는 일

책장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장면은

언제나 옳다.


빈 커피잔, 물잔 하나,

케익 부스러기 남겨진 접시,

그리고 사락사락 바람에 날리는 책장


누구인지 사람은 없고 머물렀던 풍경만

남아있다. 한참을 오질 않는다.

그런가 보다 하고 시선을 내 커피잔으로

옮겼는데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락 사락


그 자리로 계속 눈이 간다.

무엇 때문인지 남겨진 자리에

향기 같은게 남았다.


누굴까. 궁금해진다.


누군가 머물렀던 자리에

그 사람의 풍경이 여운으로 남았다.


문득,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풍경이고 싶다.



혼자 오는 여행이라고 해서

24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을 의미 하진 않는다. 낮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되 저녁엔 전국 각지에서 온 낯선 청춘들과 얼굴을 마주한다. 생김새 만큼이나 나이도 직업도 여행의 계기나 목적도 다양하다.



그날 밤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이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낯을 가리는 듯 하더니 저녁 식사와 술 한 두잔이 곁들여지니 좀 편해지는 듯 했다. 물을 마시려고 물을 찾으면 어느새 물을 따라줬고, 손에 뭐가 뭍어 손을 닦으려고 하면 어느새 눈 앞으로 화장지를 가져다 줬다. 눈치가 빠르고 굉장히 세심했다. 하필 사방이 깜깜한 제주의 편의점은 꽤 멀었고 그 길을 같이 동행한 그날 밤의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그 짧은 시간에 나눌 수 있는 내용인가 싶을 정도의 고민이 오가고 한층 가까운 느낌이 들 즈음, 물어왔다.


"내일 같이 다닐래요?"


제주에서 여행 메이트는 이상할 것도 낯설 것도 없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어색한 공기가 오갔을 뿐.


밤은 빠르게 아침을 불러왔다. 하늘은 어느때 보다 눈부셨고 노천 식당 한켠에서 해물 듬뿍 들어간 시원한 라면국물을 들이켰다.


멀지 않은 곳에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카페가 보인다. 바다를 끼고 있는 그림같은 풍경에 자연스레 이끌린다.


날씨가 화창하다 못해 반짝 반짝 하다. 이런날은 카페에 앉아있기만도 드라이브 하기만도 아깝다. 걸으면서 온몸으로 날씨를 즐겨야 했다.


"걷는거 좋아해?"


내가 물었다.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왠만해서 정색을 하며 '별로!' 라던가 '아니, 싫어해' 라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마는 그래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문득,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진정 걷는 걸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걷는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가 좋아하냐고 묻는 심리를 알고 배려했을 가능성이 크겠다.


지난번 제주에 왔을때는 날씨가 내내 흐려서 제대로 본 것이 없다는 말에 오늘 같은 날씨엔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었다.


제주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색을 보여주는 곳, 협제로 왔다. 처음 협제에 왔을 때가 기억이 난다. 버스에서 내려 바다가 보이자 마자 딱 한마디가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왔다.



거짓말



어떤 단어로 수식하고 형용하기 힘들었다. 그냥 거짓말 같았다. 그날의 풍경이.

그래서 멍하니 앉아 한동안 바라만 보다 왔는데 오늘은 걷고 싶다. 바다를 따라 모래사장을 걸었다. 이런 저런 얘기, 어제 낯가린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친구얘기, 가족얘기를 다 나누고 있었다. 장난을 치며 까르르 웃어 넘어가기도 하고 바다를

보고 멍하니 서있기도 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요"


반나절을 훌쩍 넘기는 시간을 같이 보내고 다음 숙소를 향해 각자 헤어졌다.


사실 나도 잠깐 생각했었다.


'오늘 하루의 시간이 한동안 멈췄으면'



헛된 기대가 없기에 실망도 없으며 다른 어떤 걱정과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간. 그날의 날씨와 내 눈앞의 풍경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그것만이 내 머릿속의 전부였다.



가볍고 자유로웠다.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 그 친구로부터 생각지 못한 사진이 몇 장 왔다. 가벼웠던 하루가 무거운 어둠으로 잠식되는 기분에 서늘해졌던 마음이 사진 몇 장으로 따뜻해졌다.


보낸 사진 한장 한장의 모든 풍경에 내가 알지 못하고 찍힌 내 모습이 가득했다.


내가 의식하지 않았던 순간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이 내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




두고두고 생각날만한 반짝거리는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視線 시선 그리고 내가 있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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