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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ventud Dec 16. 2016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여행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 오늘의 이야기

11시 정각. 오픈 시간이 돼서야 카페 내부를 가린 천 커튼이 열렸다. 낡아 보이는 미닫이 문을 드르륵 하고 열었다. 적당히 어두컴컴한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빵 굽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10분 후면 갓 구운 빵이 나온다고 하니 바닐라라테 한잔과 블랙 올리브 치아바타를 주문했다. 이 카페는 다른 카페와 달리 들어오는 문 앞에도, 그리고 메뉴와 함께 주는 안내사항에도 명시되어있다. 타인의 시간을 배려하지 않는 큰 목소리 자제, 노 키즈카페는 아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아이들이 큰소리로 떠들거나 뛰어다니지 않게 해주시라는 안내사항. 사실 여행 중에 들르는 카페는 정신없이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곳보다는 조용하게 그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 어떤 사람은 숨 막히게 조용해서 답답함을 느꼈다고도 하는데 나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조근조근한 말소리가 노래 가사처럼 어우러지는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사실 12시 40분에 조수리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카페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깐 고민 끝에 정 가고 싶으면 3시 10분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새 시계는 2시 56분을 가리킨다. 창 밖엔 오늘 예보된 비가 적지 않게 내리고 있고 바람도 제법 불어 이제는 더 이상 이동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되었다. 그냥 여기서 더 뭉그적거리다가 가야겠다. 어쨌든 오늘 하루 종일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싶었으니 그 계획은 이룬 셈이다.























사진을 찍느라 기다리다 지친 커피 거품에 구멍이 송송낫다.









과일쨈을 넣은 수제요거트도 정말 맛있었다


사실 사진으로 분위기가 전달이 안된다. 누구라도 이곳이 궁금하면 혼자 와서 조용히 이 분위기를 느껴보길 추천한다. 커피도 꽤 맛있었고, 치아바타는 부푼 기대에도 부응했다. 부드럽고 적당했다. 카페의 미닫이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치아바타를 사러 왔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치아바타는 아마 1인당 살 수 있는 양이 한정돼 있는 듯했다.



비는 부슬부슬 쉬지 않고 내렸고, 비오는 날이 늘 그렇듯 이 공간을 채우는 작은 소리도 웅웅 하고 울렸다. 커피 그라인더의 원두 내리는 탁탁 거리는 소리도, 카페 앞을 지나는 빗물을 가르는 차 소리도 더 선명하게 들렸다. 쌀쌀한 바깥공기 탓에 서리 낀 창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곳을 더 떠나기 싫어진다. 노오란 불빛으로 밝혀진 카페 안은 따뜻하고, 아늑하다.












꽤 길었던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겨울 제주는 다른 계절에 비해 (공항을 제외하곤) 한적했다. 그래도 볕이 따뜻했고, 바다는 찐한 파란색을 띄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끽했고, 몇몇 사람들과의 만남도 꽤 의미 있는 장면을 남겼다.


 


그 날의 찬바람도 녹이는 청귤차, 따뜻한 풍경이 되어준 아이들



겨울 제주에는 볼 것이 없을 줄 알았다. 고생스러울 줄 알았다. 하지만 겨울이라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고, 겨울이라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겨울이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겨울 제주 바다는 목캔디를 입에 머금고 세상 가장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 그 첫 숨 같은 느낌이랄까. 상쾌하고 시원하고 후련하다.















마지막 여행의 밤이 아쉽지 않을 만한 책을 보고 싶었다. 노을이 질 즈음 카페로 들어와 책이 소품처럼 놓여있는 선반을 빠르게 훑었다. '제발 보고 싶은 책이 있길.' 시선이 빠르게 십 수권의 책을 지나치다 한 권에 멈췄다. 예전에 유명한 드라마에서 작가가 소재로 책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던 바로 그 책이다. 남자 주인공의 책 읽는 목소리가 나긋해서 인지, 동화 같지만 가볍지 않은 듯한 내용에 한 번쯤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잊혀졌고 오늘 여기서 그 책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길지도 않고 쉽게 읽어 내려갈 만한 내용인 거 같아 오늘 여기서 읽기에 딱이다 싶었다.


많은 사람이 봤을 것 같지만, 또 대부분 사람들이 알긴 해도 의외로 나처럼 아직 보지 않았을 거 같은,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이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토끼 에드워드가 주인공이었다. (토끼 인형이지만 토끼 본인이 인형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기에 토끼라 명명한다.)



에드워드는 사계절 중에서 겨울을 가장 좋아했어요. 해가 일찍 지고 거실 창문들이 어두워지면 자기 모습이 유리에 비쳤거든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신기한 여행 中)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신선하게 표현하다니, 닮고 싶은 표현법이다.'



"옛날에 아주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어.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뜬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공주였지. 하지만 공주가 아름답건 아름답지 않건 무슨 상관이 있겠니? 아무 상관도 없었어."
애빌린이 물었어요.
"왜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공주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이라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았거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말이야." (신기한 여행 中)



에드워드는 자신을 소유한 에빌린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몰랐던, 감정이 없었던 토끼였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에드워드의 심경에도 변화가 온다.


에드워드의 가슴이 말했어요.
'루시'
에드워드는 생각했어요.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헤어져야 하는 일을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할까?'
외로운 귀뚜라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죠.
에드워드는 귀를 기울였어요.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아팠어요.
에드워드는 울고 싶었답니다.  (신기한 여행 中)







지지난 밤, 게스트는 몇 없었지만 온 사람들끼리 모여 조촐하게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한라산(제주도 소주)도 등장했고, 유산균 막걸리도 그 자리를 거들었다. 이십 대 중후반의 민영(가명)이는 키도 크고 외모도 준수하고 말도 곧잘 하는데 자신감까지 겸비해서 첫인상은 재밌지만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이미지였다. 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여행 얘기로 시작한 자리가 일에 대한 이야기, 진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청춘에게 빠질 수 없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남자 나이로 치면 한창 신나게 연애를 할 나이라고 생각했던 민영이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2-3년 뜨겁게 연애를 한 이후로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더 이상의 그런 종류의 사랑은 없을 거 같다는 말. 그 여자와 만날 때는 친구도 마다하고 연애에 빠져 들었다고 했다. 헤어지고 나서는 휴지 한통을 다 썼을 정도로 울었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감정을 쏟았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사실 이 얘기에는 각색이 들어갔다.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을 더했다. 누구라도 한 번쯤 누군가를 뜨겁게 만났다면 내 얘기인가 할 수 있는 스토리다. 민영이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얘기 일 수도 있겠다.


그 사람을 만날 때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온몸이 붕 뜨는 듯한, 온갖 스트레스가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나였고, 그 중심에 나를 데려다 놓은 것이 그 또는 그녀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세상의 크나큰 배경이 된 존재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는 것은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박탈이자 공황이다.


에드워드가 속으로 말했어요. '날 보세요.' 에드워드의 팔다리가 움직였어요.
'날 보세요. 할머니가 소원을 빌었잖아요. 난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건 끔찍한 일이었어요. 아파요. 마음이 아프다고요. 날 도와줘요.'  (신기한 여행 中)



안다. 민영이 어떤 마음이었고, 어떤 느낌이었을지.


그래도 이어진 민영이의 그 말에는 절대 아니라고 싶었다.



"더 이상 그때의 감정과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그런 사랑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어요."


나이 많은 인형이 말했어요.
"이번에는 누가 날 데려갈까 궁금해. 누군가가 올 거야. 누군가가 항상 오니까. 이번에는 누굴까?"
"누가 날 데리러 오든 난 신경 안 써."
"하지만 그건 끔찍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는 의미가 없잖아. 의미가 없어. 기대를 가져야지. 희망을 가져야 하고. 다음에는 누가 널 사랑하고 네가 누구를 사랑하게 될지 궁금해야지."
에드워드가 말했어요.
"난 사랑을 받아 봤어. 사랑은 끝이야. 아주 고통스러워."
"흥, 용기는 모두 어디로 간 거야?"
"다른 어딘가에 있겠지 뭐."
"넌 날 실망시키는구나. 날 아주 실망시켜. 네가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 어떤 여행도 무의미해. 넌 지금 당장 이 선반에서 뛰어내려서 수백만 조각으로 부서지는 게 낫겠다. 끝내 버려. 지금 끝내 버리라고."  (신기한 여행 中)



그건 아니라고 했다. 세게 고개를 흔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내게 물었다.


"그럼 그렇게 뜨거운 것이 지나가고 나서,다시 그런 감정을 가졌던 경험이 있어요?"


있다고 했다. 무조건 있다고 해야 했다. 설사 사실은 민영이의 말이 맞다고 해도 그렇게 믿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속으론 민영이의 모습에서 지난 내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속절없이 무턱대고 누군가를 좋아하긴 힘들 거 같아.'


한때 나 역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감정을 쏟았고, 소모했다는 반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앞으로는 가슴 뜨거운 연애를 하지 못함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를 만났을 땐 그때와는 다른 느낌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물론, 하얀 스케치북에 처음으로 빨간 물감과 노란 물감을 겁도 없이 직직 그어보던 그때의 자극적이고 신선한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그린 그림에는 이미 지난 연애로 여기저기 채색되어 반짝이던 물감들이 다 바래 있어 더 이상 근사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 같았지만, 다시 붓을 들고 더 어울리는 색으로 더 신중하게 그림을 그려갈 수 있었다. 따뜻하게 다가와서 닫혀있던 문을 열고 한차례 바람으로 불어오더니 어느새 가랑비처럼 사삭 스며들었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이 책의 말미에는 아주 특별한 말은 아니지만 글의 맥락상 특별하게 다가온 대사가 있었다. 민영이가 봤으면 좋을 책, 또한 여기 이 글을 보는 많은 민영이가 한 번쯤 가볍게 봤으면 하는 책이다.



다시는 그런 예쁜 감정도, 흠뻑 빠지는 사랑도 없다고 스스로 단정 짓고 마음을 무장한 누군가에게 과연 누가 다가와 봄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상대가 한걸음 오면 내가 한걸음 가야 그제야 거짓말처럼 봄은 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이 믿는 한  '뜨거운 것'보다 더 좋은 은근히 따뜻하게 오래가는 그것이 온다.





여행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 오늘의 이야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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