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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ventud Jul 15. 2017

人生 꼭 한번, 여행

당신에게 주고싶은 최고의 선물


엄마랑 떠난 타이완 여행 1탄



"엄마, 나랑 둘이서 여행 가자, 모녀여행!"


올해 이루고 싶은 '꿈' 중 하나는 엄마와 단둘이 가는 여행 이었다. '꿈'이라고 거창하게 표기한 이유는 매번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다른 일들에 밀려나기 쉬워서 '어려워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 좋은 여행 친구랑도 가고, 남자친구랑도 가고, 심지어 혼자서도 가는데 왜 이제껏 엄마랑은 가지 않았을까.




엄마는 단 한번도 나에게 자신을 1순위로 요구한 적이 없다.

당신에게는 나를 비롯한 가족이 늘 1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갈까?' 물어보면 '언제?'라던가 '어디로 가자'라고 한 적이 없다. 바쁜거 먼저 하라고 미루고, 딸에게 재정적인 부담이 될까해서 미루고, 혼자가기 아빠한테 미안해서 미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엄마는 오래 걸으면 허리가 뻐근하고, 무릎이 시큰거리는 나이가 되었다.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이 티켓은 특가라 환불이 안된다고 하면 알뜰한 엄마 성격상 딸 배려하는 마음도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도 한결 편하게 접어둘 수 있다. 괜한 걱정에 내심 여행 가고싶지만 애써 사양하는 어머니가 계시다면 사용하기 좋은 방법이다. 환불안되는 티켓끊기 + '안가면 돈 아깝다'는 합당한 이유 콤보를 활용해 보시길 바란다.







출국 하루 전, 서울로 올라오시는 엄마를 터미널로 마중 나갔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저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두팔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나를 보자 마자 4시간 넘는 시간 동안 버스에서 참아냈던 설레는 마음을 쏟아냈다.



"지금 입은 옷 그대로 내일 입고 갈라는디 괜찮을랑가? 이쁜가?"

"안에 내의를 입을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가 안입었네, 들고가서 추우면 입지"

"모자 보여줄까, 어제 샀는데?"

"샌달도 하나 챙겨왔네, 비오면 신으려고!"



엄마는 집으로 오는 내내 챙겨온 소품들을 하나 하나 빠짐없이 소개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내내 웃음이 피식피식 삐져나왔다. 대만의 쨍쨍한 햇빛을 기대하며 시장에서 만팔천원 준 모자와 한달의 절반은 비가 온다는 3월의 대만날씨를 대비한 샌들은 엄마의 들뜬 기분을 대변했다. '만반의 준비'라는 단어를 이해 못하는 어린이가 있다면 엄마의 짐가방을 열어 보여주면 되겠다 싶을 정도.



엄마는 집에 도착 하자마자 여행가방 속에 챙겨온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고 씻고 나오시더니 피곤하셨는지 바로 잠에 들었다. 갑자기 생긴 과제에 밤을 꼴닥새고 나니 여행의 아침이 밝았다. 오후 2시 김포공항에서 출국인데다가 미리 웹체크인을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집에서 나가기 1시간 전부터 옷을 다 갈아입고 앉아계셨다. "엄마랑 나랑 비행기 시간이 다른가?"하고 물었고, 엄마는 "응, 다른갑네"하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엄마의 마음은 이미 비행기에 탑승해서 안전벨트까지 매고 이륙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


"이거 꽃할배들이 자주 찍대"


수화물 체크인과 함께 출국 수속을 순식간에 마쳤다. "엄마가 커피한잔 사줄께!" 싱글벙글 엄마는 지갑을 꺼내들었다. 우리는 기내식으로 나올 커피대신 크림치즈가 곱게 발린 베이글을 반으로 나눠 먹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만 가서 미안하요, 다음엔 꼭 같이 가. 냉장고에 냉이국 찾았소? 그 냉동실에도 고기 얼려놓은것도 있고.."

엄마는 출국 직전까지 아빠에게 냉장고 브리핑을 할 기세다. 혹시나 당신 안 계신 동안 아빠가 부실하게 드실까봐 걱정이다. 집에서는 아들딸 걱정, 서울 오면 아빠 걱정이다. 엄마는 우리가족에게 있어서 가장 존재감이 큰 사람이라 없는 자리가 너무 티가난다. 그래서 어딜가나 자신이 없는 자리에 애정과 관심을 꽉꽉 눌러담은 걱정을 남겨둔다.


"내 걱정하지말고, 간 김에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소. 딸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아빠는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멋진 남자였다.


보딩타임, 드디어 게이트가 열렸다. 엄마는 신문을 보는듯 마는듯 접어두고 활주로로 향하는 비행기 창밖을 응시했다. "어, 인제 이륙하네!", "이렇게 큰 비행기가 공중에 뜨는게 매번 봐도 신기하지", "저기가 인천인가?" 엄마는 비행기 처음 탄 꼬마가 된 것 마냥 천진한 질문을 이어가다 이윽고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 한구석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나는 그토록 자주 나다니는 동안 엄마는 이제 두번째다.




이렇게 좋아하시는 걸.



우리가 이용하는 에바 항공은 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된 항공사인데, 대만에서 중화항공 다음으로 큰 항공사라고 한다. 특이점이 기내식 종류가 열가지가 넘는다. 채식, 과일식, 어린이식, 저칼로리식, 해산물식 그리고 무려 당뇨식까지. 말그대로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사전에 기내식을 선택하면 일반식보다 먼저 받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다. 우리는 해산물식과 계란 유제품이 허용된 채식을 선택했다.


이른 아침을 먹고 11시에 나오느라 점심을 거른 엄마는 공항에서부터 허기 진다고 했었다. 빨리 기내식이 나와야 할텐데 하던 차였는데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내 이름과 엄마 이름이 적힌 기내식을 들고 왔다.



엄마의 메뉴는 해산물이 들어간 토마토 파스타에 연어 샐러드 그리고 오렌지 시럽이 올라간 찐한 초코 케익이 후식으로 나왔다. 유제품이 허용된 채식을 주문한 내 메뉴는 찐 야채가 곁들여진 크림 파스타에 비스킷과 치즈가 사이드로 나왔다. 와인을 한잔씩 받아들고 우리의 여행을 위해 속닥거리며 건배를 했다.


"첫 모녀여행을 위하여!"






어쩌면 엄마 딸로 살면서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아이처럼 들뜨고,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비행기 탑승과 동시에 누구 엄마, 누구 아내의 명찰을 잠시 내려놓고 엄마 이름 석자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눈에 담는 것이 행복했다. 새삼 미안하고, 감사하고, 안쓰러운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일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 엄마가 한번을 내색않고 숨겨왔던 희생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지나버린 엄마의 빛나는 시간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랬다. 누군가의 빛나는 시간은 누군가의 빛바랜 시간이 있기에 가능했다.









'제발 날씨만 너무 나쁘지 않길, 절기상 매일 화창하진 않아도 최소 이틀은 맑은 날씨이길..'




기대와 우려를 안고 비행기의 바퀴가 송산공항에 가뿐하게 닿았다. 오늘과 내일의 숙소는 기대를 많이 했던 숙소였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호스텔은 깔끔하고 위치도 좋았지만 방이 너무 작아 보였고 결정적으로 남은 방이 없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한국인의 방문기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여러나라 사람들의 후기가 꽤 좋았던 곳이다. 거기도 저렴한 방은 이미 매진이라 남은 방을 골라 예약 했다. 다행히 우리가 도착한 송산공항에서 택시로 10분거리였다.



원래 예상했던 방 가격보다 5만원 정도 비쌌지만 그 덕에 방도 작지 않고 욕조도 있는데다 통창으로 시원스레 바깥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짐을 방에 두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타이베이타워 1층에 있는 딘타이펑으로 향했다.


"엄마, 저기 켜켜히 쌓여있는 것 같은 빌딩이 타이베이 101이야"


바닥에 주저 앉아 찍어야 화면에 담기는 높이



평일이고 이른 저녁시간이라 비교적 여유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식당이 워낙 크고 직원이 많아서 그런지 많이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엄마가 앉은 자리 뒤로 꽤 많은 직원들이 위생복을 갖춰입고 딤섬을 빚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샤오롱바오와 볶음밥에 엄마 입맛에 좀 느끼할거 같아서 오이김치와 맥주 한병을 주문했다. 오랫만에 먹는 샤오롱바오가 반가웠지만 엄마는 역시 편의점 컵라면용 김치라도 필요한 듯한 눈치였다. 그래도 맥주는 맛있게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타이베이 타워 야경을 보다가 미리 예약했던 경극을 보기위해 타이베이 아이로 이동했다. 이날 밤의 경극 공연 자체는 사실 제대로 보지 못했다. 출국전 주말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여행을 위해 조기에 끝내느라 한 숨도 못잤던 탓에 저녁이 되자 어디든 앉기만 하면 수면제 먹은 것처럼 잠이 몰려왔다.





그래도 공연장이 꽤 마음에 들었다. 공연 시작전에 무대에 오를 배우들이 분장하는 모습도 볼 수도 있고, 무대의상을 직접 입고 사진을 찍는 시간도 있었다. 특히나 엄마에게는 재미유무를 떠나 처음 보는 극의 형태였기 때문에 더 신선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열심히 어깨에 머리를 콕콕 찍으며 졸음과 사투하는 내 옆에서 엄마는 공연을 끝까지 완주했다. 그렇게 화려하게 여행의 첫날이 저물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마쉬멜로같은 푹신한 침대에 빨려들어가듯 잠에 들었다.







촉촉한 타이완의 아침



이 호스텔이 마음에 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조식을 먹는 로비였다. 사진에서 본 로비의 풍경이 내가 딱 좋아하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오늘 드디어 첫 조식을 먹게 됐다. 하지만 로컬 향이 나는 음식이 나오면 행여나 엄마 입맛에 맞지 않을까 내심 걱정은 됐다. 로비에는 일찍이 아침을 여는 여행객들 덕에 향긋한 커피향과 고소한 빵냄새가 가득했다. 얼핏 둘러보기에도 한국인은 엄마와 나, 두사람 뿐인듯 했다. 새삼 엄마랑 타국으로 여행을 온 느낌이 물씬났다. 내 걱정과 달리 엄마는 흰죽과 간장베이스로 된 국 한그릇, 토스트 재료를 접시 가득 담아와서 맛있게 드셨다. 심지어 토스트에 이걸 넣어서 이렇게 해먹으면 더 맛있다는 레시피까지 공유했다.



  

이틀통안 엄마와 나의 지정석이 된 쇼파
물 건너온 멸치반찬이 무안할 정도로 잘 먹은 조식
엄마표 대만식 토스트, 완맛!
두접시는 기본


창 밖엔 얌전한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공기에 쌉쌀한 커피향이 더 향긋하게 느껴진다. 온천은 비가 오면 가는 '카드'였는데, 마침 오늘이다. 대만에도 유명한 온천이 꽤 있다. 3월말의 선선한 대만날씨에 가기 딱 좋은 코스다. 원래는 여행 막바지에 피로를 풀기위해 귀국 하루 전 인 월요일에 가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가려고 했던 신베이터우에 온천 박물관과 목조건물로 된 도서관이 월요일엔 휴무였다. 그래서 토요일인 오늘의 날씨를 보고, 비가 오면 오늘 온천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우산과 우비를 챙겨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대만은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고 지하철도 알아보기가 쉬워서 초행임에도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었다.



 

대만의 흔한(?) 환승역
신베이터우로 가는 열차


신베이터우는 대만의 온천마을인데 숙박을 하면서 온천을 하는 온천 호텔도 있고, 우리네 온천처럼 온천만 즐기는 노천 온천이나 작은 방이 딸려있는 프라이빗 온천까지 다양한 형태의 온천이 있다. 우리는 프라이빗 온천룸을 사용할 수 있는 골든핫스프링으로 향했다. 신베이터우로 향하는 전용기차를 환승해서 얼마 가지 않아 도착했다. 도심에서 벗어나서 인지 주말임에도 조용하고 한적해서 너무 좋았다.


온천마을의 첫인상, 청초


"엄마, 여기 조용해서 너무 좋다. 비오니까 더 분위기 있는거 같애. 그치?" 알록달록한 우산을 나란히 들고 조용한 동네를 걸어 들어갔다. 대기표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바로 온천으로 갔는데 다행히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내 받은 방에는 작은테이블과 전면 거울이 있는 옷을 갈아 입을 수 있는 칸과 온탕과 냉탕이 있는 욕실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크진 않지만 둘이서 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가까이 앉아 속깊은 얘기를 털어 놓기엔 더 없이 좋았다.



"밖에 저기 아파트에서 보일까? 이불 털러 나왔다가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을까?"


동그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말했다. 따끈한 온천물에 몸을 푹 담그고 바라본 창문 밖에는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꽃할배들이 다녀갔다는 노천온천도 보였다. 몸이 뜨거워지면 냉탕으로 첨벙 들어갔다가 추워지면 다시 온탕으로 쑥 들어왔다. 비오는 날의 온천은, 특히 엄마와의 온천은 생각보다 은밀하고 아늑해서 좋았다. 엄마도 혹시 대만 다시 오게 되면 이 온천은 다시 오고싶다고 할 정도로 좋아하셨다. 물이 좋은건지 온천을 마치고 쿠션을 콕콕 찍어 바르던 엄마와 나는 화장이 잘먹는다며 감탄을 거듭했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제일 예쁘다는 포즈


촉촉해진 피부에 대한 감탄도 잠시, 온천 후에 무섭게 허기가 찾아 왔다. 조식을 그렇게 먹어놓고. 여기가 온천수로 끓이는 라면이 유명하다고 해서 "满来만라이"라는 라면집으로 곧장 향했다. 온천에도 없던 줄이 라면집에서는 장사진이다. 현지인들이 꽤 많은걸 보면 맛집인건 확실해 보인다. 여기서도 한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 역시 원래 한국인한테 유명한 라면집이 있는데 나는 다른 곳을 선택했다. 청개구리 여행자.



라면집 안이 마치 작은 옛날 드라마 세트장처럼 꾸며져 있어서 보기 좋았다. 자세히 보면 천정가까이 줄이 보이는데, 주문을 받으면 주문서를 고리에 매달아 힘껏 앞으로 밀어 던지면서 주문을 넣는 시스템이었다. 가끔 주문넣기를 손님들이 도전해서 성공하면 특정메뉴를 서비스로 주는 화기애애한 라면집이었다. 엄마는 김치가 들어간 라면, 나는 해물이 듬뿍 들어간 라면을 주문했다. 물론 김치는 한국의 김치맛이 아니었기에 엄마는 생각보다 느끼하다고 했다. 나는 맛있게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저녁에는 숙소 근처에 한식집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이 동네는 참 예쁜곳이 많다


부른배를 토닥이며 꼭 보고싶었던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 냄새나고 책 읽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을 참 좋아하는데 온천 마을에 이렇게 매력적인 도서관이 있을지 몰랐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목조건물 도서관을 보고 한눈에 빠져버렸다. '베이터우 시립도서관'이었는데, 2012년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한 곳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과하게 멋지더라니.


 


건물이 전체적으로 다 나무로 되어있어서 참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데 외형 디자인 자체는 굉장히 현대적이다. 내부도 다 나무로 되어있어서 동네에 있는 도서관이면 거의 매일 오고 싶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늘 가까이 없을때 하는 생각. 테라스도 길쭉 길쭉 시원하게 열려 있어서 책보다가 답답하면 나와서 바람쐬기 좋을 것 같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이다.



도서관을 지나 길따라 더 올라가면 물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지열곡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나섰다. 물이 자그마치 65-100도에 이르고 이 열기때문에 생성된 수증기가 소독차 열대는 족히 지나간 수준으로 피어난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고 정말 궁금했다. 이렇게 조용한 마을에 그런 곳이 있다니. 엄마도 온천의 원천을 보는 건 처음인 듯 하다.


 



정돈된 꽃 길을 지나 어느순간 불어난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걷다보니 지열곡이 나왔다. 아직 수증기는 커녕 조그만 연기도 보이지 않는데 여기 정말 끓는듯한 물웅덩이가 있는 걸까. 조급해진 걸음으로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갔다. 연기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따스한 기운이 불쑥 다가왔다.



수증기가 불어오는 바람에 비켜서니 투명한 청록빛에 가까운 물이 실제로, 정말로, 사실로 부글부글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거대한 솥에 자작하게 끓고있는 신비한 물처럼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가히 장관이다. 자연의 신비한 힘을 다시 한번 느끼며 아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마침 바로 전화를 받은 아빠에게 엄마와 나는 흥분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한바탕 통화를 마치고 더 습해지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걸어 나오는데 한무리의 중학생으로 보이는 현지 학생들이 한 선생님의 인솔아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와 내가 대화하는데 한국말이 들려서인지 돌아가면서 힐끔힐끔 뒤를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여기는 정말 고마울 정도로 '한국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다. 지난 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도 여학생 둘이 엄마와 내 옆에 섰는데 한국말을 들었는지 한국 아이돌 노래를 자기네끼리 조그맣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국어로 또박또박. "엄마, 쟤네가 부르는 노래가 우리나라 아이돌 노래야, 최신곡인데 다 알고 있나봐." 정말 신기하고 왠지 기분이 좋았는데, 이 아이들도 아니나 다를까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현지어로)한국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같이 사진찍을 수 있을까요?"라는.......믿기지 않는 멘트를 날렸다.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진을 찍자구요? 우리랑?" 표정은 확고했다. 주변 아이들도 허락을 바라는 눈빛으로 다같이 쳐다본다. "엄마.. 사진을 찍자는데?" 엄마의 당황한 표정에 나조차 웃음이 터져버렸다. 인솔하던 선생님이 여러명의 핸드폰을 받아서 사진을 찍어주셨다. 엄마와 나를 중앙에 두고 양 옆에 선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연신 우리를 보며 "한국어로 말을 하고있어!!"하는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웃는 얼굴들이 얼마나 예쁘고 또 그 마음이 고마운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사진을 찍고 연신 고맙다며 밝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엄마는 한국 사탕이라도 가져왔으면 하나씩 줄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과자라도 하나 챙겨올걸, 쟤네 뭐라도 주면 좋았을걸." 엄마는 앞으로 먼저 걸어가는 애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안타까워 했다. 지열곡 초입으로 나오니 온천수에 삶은 옥수수를 팔았다. 하나 사서 반으로 나눠서 먹었는데 달달하니 맛있었다. 갑자기 애들한테 옥수수라도 쥐어주고 싶다는 엄마 덕에 한참을 웃었다.




엄마는 정이 참 많은 사람이다. 손재주도 좋아서 뜨게질도 잘하고 음식솜씨도 일품이다. 어렸을 때 양념통닭 외엔 거의 바깥음식을 시켜먹은 적이 없다. 짜장면, 탕수육, 감자탕, 아구찜, 식빵으로 만든 피자까지 정말 부지런히도 만들어 주신 덕에 자라는 내내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즐겼다. 특히 직접 손으로 꾹꾹 눌러서 만든 돈까스는 맛있게 구워 테투리에 꽃이 그려진 너른 접시에 크게 얹고 샐러드와 동그랗게 모양을 낸 밥까지 올려 특제 소스를 듬뿍 뿌리면 엄마표 경양식집 부럽지 않은 상이 차려지곤 했다. 내가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면 귀찮을만도 한데 엄마는 후다닥 만들어서 맛있게 먹는 나와 내 친구들의 오물거리는 입을 보고 뿌듯해 하시곤했다. 그덕에 나는 내 맘에 꼭 드는 친구가 생기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내 자랑인 엄마의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우리집에 데려오곤 했고, 그런 나의 마음과 엄마의 애정어린 요리가 어우러져 우리집에 다녀간 친구들은 나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되곤했다.    






오후에는 여기서 멀지 않은 단수이에 가기로 했다. 단수이는 옛날에는 항구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관광지로 바뀐 곳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요 배경지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보는 노을이 멋지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던 곳인데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라 일단 가보기로 한다. 단수이하면 일몰보다 유명한 것이 대왕 카스테라라고 했다. 한국에서 한때 줄서서 먹는 히트간식였고, 또 얼마전 시끌시끌 할때까지도 나는 한번도 먹어보질 않았다. 그래도 여기 원조가 있다고 하니 빵 좋아하지만 평소에 자제하는 엄마를 위해 '여행'을 핑계로 맛보자고 이끌었다.



역사를 나오자 빗줄기가 꽤 굵고 바람이 불어 챙겨온 노란 땡땡이 우비를 입었다. 비가 오는대도 가게 앞에는 우산을 쓴 대기손님들이 꽤 있었다. 막 구워 나온 카스테라가 순두부처럼 탱탱하고 몰캉몰캉한 탐스러운 비주얼로 이목을 끌더니 이내 코 끝에 달달하고 고소한  빵냄새가 와 닿았다. 큰 빵틀을 자유자재로 들었다 놨다하며 빵을 자르는 직원들의 손놀림 역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한국돈으로 3000원 정도 주고 정말 믿기 힘들정도로 큰 카스테라 한 덩이(라 부르고 식빵 한줄이라 해야 맞을 듯) 를  건내 받았다. 비가 오니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카페 입구에서 대자로 숙면중인 터줏대감견


여기서 커피와 함께 이 빵을 먹어도 되냐고 먼저 물었더니, 많이들 사서 오는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엄마가 먼저 카스테라 한조각을 떼어 입에 넣었는데, "뭐시 이렇게 부드럽냐, 엄청 부드럽다"며 감탄을 했다. 궁금해 하는 내 입에 엄마가 한조각 떼어 넣어 주는데, 정말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극강의 부드러움이다. 맛의 설명을 떠나서 일단 부드러운 식감에 기분이 사르르 녹는다. 손이 멈추지 않아 계속 떼어 먹었다. 생각보다 많이 달지 않아서 더 쉼없이 먹게 되는 맛. 이렇게 크게 팔면 어떻게 다 먹냐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던 우리는 그 자리에서 3분의 2를 해치웠다. 다음날 아침 마지막 남은 한조각까지 클리어.


단수이 시장에서 팔던 싸고 귀여웠던 소품들
메추리알로 만드는 길거리간식
비오는 단수이


그 날의 단수이는 비오는 감성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단수이 강변에서 보고 싶었던 노을은 눈에 담지 못했다. 시기적으로 성수기가 아니어서 인지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았다. 실망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왜인지 엄마랑 나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비가 오는데도, 강변이라 바람이 다소 강해서 우산이 뒤집히려는 데도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깔깔 웃어댔다. 노을이 없었어도, 번쩍번쩍한 가게들이 많이 없어도 서로가 있어서 반짝였던, 그래도 괜찮은 단수이에서의 추억이 남았다.



엄마와 함께 처음하는 경험들이 늘어날 수록 두고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도 늘어 갔다. 서른을 넘긴 내가, 오십을 훌쩍 넘겨 육십을 바라보는 엄마가 '처음 하는 경험'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 건 정말 특별한 행운이다. 엄마에게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했던 이번 여행은 아무래도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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