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을 오름
어렸을 적 본 만화에선 달나라에 놀러 가기도 하고 그랬다. 반짝이는 밤하늘만큼 아름다운 음악들이 깔리고 모두들 사이좋게 노니는 그런 달나라. 거기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한 때 꾸었던 것도 같다. 좀 더 자라나 달에서 살 수 없다는 걸 과학 시간에 배우기 전까지는.
그래도 가끔 지나치게 선명하고 둥근 보름달 표면에 토끼 모양 같은 것이 어른거릴 때면, 정말 저곳엔 누군가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스치는 걸 막을 순 없다.
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왔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비자림과 성산일출봉, 그리고 오름을 두고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던 그때엔 '갑자기 제주가 추워졌다'고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님이 말씀하셨다. 정말 '갑자기'가 아니라면 이렇게 추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울보다 기온은 높았지만 바람이 살벌하게 불어서 인생 최대 추위를 맛보았던 때였다.
오름에 가고 싶어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님께 넌지시 이야길 꺼내보니 "이렇게 추운 날에 오름은,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알아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젯밤에 왔는데..
그래도 한 번 가보자고, 나름 큰 마음을 먹고 택시를 타고 "다랑쉬 오름이요" 하고 말했다. 괜스레 겁을 먹고선 "이런 날 오름에 가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었는데 택시 기사님이 "정상은 조금 힘들겠지만 괜찮아요."하고 말씀해주시는 덕분에 희망을 안고선 입구에 도착했다.
역시 '이런 날씨'여서 그랬는지 오름 입구엔 사람 서 너 명 만이 시내로 나가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름은 기생화산이다. 제주에만 몇 백개의 오름이 있다고 했고, 그중에서도 이곳 다랑쉬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 불린단다. 여왕님을 만나기에 앞서 모자와 목도리로 완전무장을 마치곤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정도 걸었을까, 아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짓궂어서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이 사방을 뒤덮어 잠깐 기다리기로 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가 걷히고 난 뒤에 본 장면이란, 와- 너무 좋았다! 사방이 뻥 뚫려 있다니! 콘크리트 건물은 보이지도 않고, 초록 풀밭과 겨울스럽게 드러낸 맨 땅들. 오히려 흐린 하늘이 이 풍경을 효과적으로 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 같았다. 우린 처음에 우와! 하고 마주 보다가 잠시 말없이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억새들이 바람에 안겨 우수수, 하고 웃는 소릴 냈다.
다랑쉬 오름이 아마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건 오르는 게 결코 만만치 않아서도 그렇겠지만 여러 풍경을 품고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성산일출봉과 (사진엔 안 나왔지만) 오른쪽의 용눈이 오름, 그리고 바로 저 모카빵!
아끈 다랑쉬오름이다. 아끈은 '작은'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작은 다랑쉬오름'인 셈이다.
다시 한참을 올라 도착한 정상. 정상을 한 바퀴 도는 건 난이도 상(상 이상)이었다! 바람은 태풍 수준에다가 잡을 만한 것도 없이 쌩 자연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간지 대신 목숨을 택하기로 했다. 팔을 쭉 뻗고 자세를 낮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해가 잠시 모습을 비추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눈이 내리기도 했고, 우박이 바람에 섞여 세차게 얼굴을 때려대기도 했다. 그렇게 빨개진 볼을 하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오면서 한동안은 못 볼 이 풍경을 눈에 꽉꽉 눌러 담았던 것 같다.
그리곤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집에 돌아오고 난 후에야 다랑쉬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문득 TV 앞에 앉아있던 어린 나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다랑쉬는 달의 제주말이다'
얼마 전, 어린 날 상상하던 달과는 조금 다르지만- 달에 다녀왔다. 새까만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 대신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과 굴곡진 경사길, 토끼와 요정은 없지만 쉴 새 없이 춤을 추던 나무와 풀들,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불안한 마음과 (택시 기사아저씨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작은 용기. 그렇게 우린 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