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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Jan 16. 2021

검은 재킷

그대의 취향이 나와 맞지 않다면



겨울이라기엔 이르고 가을이라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는 달, 11월. 수능과 추위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능만 다가오면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을 한껏 움츠리게 되는 건 왜일까. 겨울 잠바를 입기 두껍고 재킷을 입기엔 다소 추운 그런 이었다. 나는 그런 에 태어났다.



사귄 지 반년만에 찾아온 나의 생일. 한껏 멋을 부리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수많은 인파 속에 그대가 우두커니 서있다. 두꺼운 잠바와 가벼운 재킷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이는 계절, 그대는 그중 두꺼운 잠바를 선택했다. 마치 정글에 동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본래 자기 몸보다 더 크게  한껏 부풀리는 것처럼 조금 큰 패딩을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군밤 색. 개인 취향이겠지만 나는 군밤 색의 그 잠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대는 노스페이스 패딩이라며 한껏 자랑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음, 그래도 싫어하는 티 팍팍 낼 수 없지 않겠는가? 나름 내 생일인데. 순간 얼굴이 구겨지고 미간에 주름이 팍 생지만 이내 표정 관리에 들어간다. 그래, 옷은 본인의 취향이깐. 참자.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해 함께 걷는 길. 한 매장에 발이 멈춰 선다. 제법 깔끔해 보이는 검은 재킷. 대가 이 재킷을 입었으면 좋겠다.


"저기 들어가 볼래요?"사귄 지 반년이 지났지만, 난 꽤 오랫동안 그대에게 존댓말을 했었다. 그대가 나보다 세 살 많은 오빠인 데다 그대가 그걸 좋아했기에. 멀뚱멀뚱 나를 보는 그대에게 그 검은색 재킷을 건넨다.


"입어봐요. 잘 어울릴 거 같아요." 본인은 재킷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종업원과 나는 한 번만 입어보라고,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사면 되지 않냐고 합동 작전, 합동 영업 들어갔다. 이내 그대는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제법 근사하다. 거울을 보던 본인도 "나쁘지 않네?"라며 방긋 웃는다. 그 모습에 나는 지갑을 꺼다. 본인 돈으로 사겠다는 그대를 막아서고, 카운터 앞에서 실랑이를 벌인 뒤 결국 내가 승. (승자가 돈을 내는 거라면 그럼 내가 진건가?) 이걸 왜 사주냐는 그대의 질문에, 그냥 잘 어울려서라 말 뭉갰다. 그 이후 그대는 만나는 날이면 늘 검은 재킷을 입고 나왔다. 날이 추워져 바들바들 떨면서도 이 옷만큼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은 없다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안다. 재킷은 푹신한 패딩보다 더 춥고 더 불편하다는 것. 그럼에도 나는 그대가 그 재킷을 계속 입어주길 바랬다.


오 년 반, 그리고 삼 년을 합쳐 정확히 팔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하면서 그대는 그때보다 얼마나 더 나에게 맞춰져 있을까. 어디 그게 옷뿐이었을까. 나는 결코 그대의 취향을 바꾸려거나 무시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그대도 재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결백을 주장하려니, 양심이 쿡 찔려 몸둘바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나는 제멋대로 취향을 바꾸려 했던 여자 친구였을까. 아니면 그대가 재킷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란 걸 깨닫게 해 준 여자 친구였을까. 이왕이면 후자였음 좋겠다. 그러기 위해 앞으로 나는, 그대의 취향은 존중하되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걸 현명하게 알려주는 그런 여자가 될 테니깐.


(남편의 기억엔 아주 좋게 남은 검은 재킷이다. "여자 친구 생일에 여자 친구에게 선물 받은 사람은 나뿐이 없다"는 말을 으슥대며 하곤 했었다. 사실은 그 군밤 색 패딩이 싫어 검은색 재킷을 굳이 사준 거라는 고백을, 아주 뒤늦게 했으니깐. )




맞아요. 봄비는 유튜브도 한답니다.

맞아요. 인스타그램도 열심히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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