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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 Jan 13. 2019

‘서울살이’라는 스펙

서울살이를 버텨낸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평생’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한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다. 부모님은 지금 내 나이보다 네 살이나 어린 시절에 고향인 경남 바닷가를 떠나 서울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서울’ 딱 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같은 서울, 다른 고민

서울살이의 동상이몽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한창 포털 메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 서울이 고향인 것만으로 이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댓글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집을 상속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차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부모님 이름으로 된 집도 차도 없거니와) 용돈을 받으며 생활했던 것도 아닌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집에서 통학, 통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금수저라고?’ 꽤 억울했다. ‘방학이면 하루 8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던 내가?’ 밥값, 책값 등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기 중에도 아르바이트는 필수였다. 그 시절 힘들었던 기억의 잔상이 여전히 강렬했기에, 더 이상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직장인임에도 그 댓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번째 직장을 퇴사할 무렵 ‘서울살이’가 하나의 스펙이 된다는 걸 알았다. 당시 팀원 다섯 명 중 나 혼자만 서울의 부모님 집에서 통근했다. 부산과 안동이 각각 고향인 두 사람은 서울에서 자취를 했고, 다른 두 사람은 경기도 고양과 부천의 부모님 댁에서 각각 통근했다. 자취 중인 팀원들은 한 달 수십만 원에 달하는 월세를 내야했고 경기도에서 통근하는 팀원들은 많게는 편도 1시간 30분씩 걸리는 출퇴근길을 감당해야했다.


하루는 친한 동료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부동산 사이트를 보고 있었다. 투룸에 살고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다음 달부터 해외체류 예정이라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하거나 방을 새로 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원룸의 월세가 더 저렴하지만, 둘이 나눠서 냈던 월세를 당장 다음 달부터 혼자 감당하기가 버겁다고 했다. 퇴근 후 밤 시가 넘도록 부동산 앱으로 회사 근처 동네를 함께 살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 서울인지라, 여자 혼자 살아갈만한 ‘안전한’ 원룸은 월세가 한달 치 월급의 삼분의 일이 넘었다. 서울살이를 시작한지 2년이 채 안 된 동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부동산 앱을 보며 공유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었다.


동료가 월세를 고민할 때 나는 퇴사를 고민했다. 다달이 수십만 원씩 월세가 나갔다면, 공과금에 식비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면, 나는 퇴사할 수 있었을까. 아니, 불가능했을 거다. 당시에도 지금도, 나는 부모님 댁에서 ‘서울살이’ 중이기 때문에 두 번째 퇴사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고민했어도 퇴사를 말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퇴사를 망설이게 하는 여러 요건 중에 ‘이번 달 급여’는 없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살기 위해 회사를 계속 다녔고 누군가는 다르게 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 같은 서울에 살지만, 서울에 살기 때문에 다른 고민을 했다.



서울살이를 버텨낸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딸, 토요일에 뭐 할 거야? 엄마랑 서촌 갈까?”


우리는 서울의 유명 데이트장소이자 관광지인 서촌까지 대중교통으로 4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사실, 서촌은 어느 날이라도 기분을 내러 즉흥적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주요 관광지이자 우리나라의 대표 관광지까지 대중교통으로 20-4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서 나는 30년 째 살고 있다.


서울에 살기 때문에 누리는 모든 것들이 당연했다. 도보 분 거리엔 한강이 있고 동네 곳곳에서는 남산타워가 보였다. 골목을 꺾고 꺾어야 나오는 달동네 다세대주택에 살지만, 서울에 살기 때문에 당연한 많은 것을 누렸다.


그러다 몇 주 전, 고향이 부산인 전 직장 동료로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남산, 덕수궁 등 서울 명소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님이 오실 때면 어딜 가고 무얼 먹으면 좋을지 매번 고민하던 동료였다. 부모님과 찍은 사진을 실시간으로 카톡에 보내주기도 했고 SNS에 올리기도 했다. 동료에게는 부모님의 서울나들이가 곧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동료는 ‘서울집’에 부모님을 하룻밤 모셨다고 했다. 그 밤, 부모님은 딸의 서울살이도 서울살림도 모두 보았을 거다. 늘 씩씩한 딸이 한파에 춥게 지내 않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궁금했을 거다. 서울토박이 눈에 비친 동료는 서울을 잘 살아내고 있었다. 3년째 이어진 서울살이가 그녀에겐 이미 하나의 스펙이었다.


1985년 봄, 서울로 상경한 우리 부모님은 단칸방에서 ‘전전세’를 살았다. 전셋집에 다시 전세로 들어가 오빠를 낳고 힘겹게 살았다고 했다. 이 지나도록 내복 밖에 입히지 못한 핏덩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전설처럼 말로만 들어왔던 이야기를 동료들을 통해 실감했다. ‘서울살이’라는 스펙은 서울에서 연고 없이 34년을 버텨낸 엄마의 타이틀이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진짜 서울살이’를 오늘도 해내고 있다.




2019년, 서울살이 중인 무수한 당신들에게

서울살이가 대단한 스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만큼 힘든 서울살이를 당신들이 해내고 있다고, 이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당신 참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힘든 서울살이를, 당신은 오늘도 해냈다.

내가 경험해온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서울을 경험해온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짜 서울살이'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 물론, 타향살이 중이든 서울에서 나고 자랐든 서울살이가 다수에게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지역에서의 삶이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울이 고향이든 아니든, 내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에서 언젠가 스쳤을 사람들이 한번쯤 자신에게 '잘 살아내고 있다'고 박수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글이다. 내가 나에게, 나의 엄마에게, 나의 동료에게, 스친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지난해 가을, 퇴사를 앞두고 남산에서 찍은 서울 전경. 퇴사로 인해 내 서울살이에 구름이 꼈지만 그럼에도 살아갈만한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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