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부터 서로를 '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빠의 그녀와 단 둘이 데이트를 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서로를 '아가씨', '새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동갑내기인 우리는 오늘부터 서로를 '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꼬꼬마 시절에 보았던 콩쥐팥쥐, 신데렐라 같은 동화에는 항상 ‘나쁜’ 새언니가 등장했다. 내가 본 동화 속 새언니들은 늘 나빴다. 그런 동화의 영향 때문인지 ‘새언니’라는 단어에 괜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오빠가 결혼하고, 동갑내기인 그녀를 ‘새언니’라 불러야 했다. ‘동갑인데 왜?’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새언니라 부르기 시작하면 그녀와 나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생길 것만 같았다. ‘새언니=나쁘다’라는 공식이 머릿속 깊숙이 새겨져 있기도 했고, 호칭이 만들어내는 힘이 있듯 우리도 결국 뻔하디 뻔한 며느리와 시누이 사이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싫은 걸. 새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아가씨라고 불리는 것도 전부 다. 누구는 새언니고 누구는 아가씨라니. ‘도련님’ 못지않게 참 달갑지 않은 호칭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요즘것들'인 90년대생 아가씨와 새언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단 둘이서 처음 만난 오늘, “안녕하세요” 인사 뒤로 우리는 “잘 지냈어?”, “결혼하니까 어때?”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말을 잘 못 놓는 성격인 내게, 먼저 편하게 말하자고 제안해준 그녀가 고마웠다. (호칭을 부르지는 않더라도 어른들 앞에서는 서로를 존대하기로 했다.)
“이제 어디 갈까? 가고 싶은 곳 있어? 우리 집에 갈래?” 그녀가 선뜻 말했다. 인터넷에서 봐왔던 수많은 글에 따르면, ‘좋은 시누이’가 되려면 오빠네 집에 ‘쉽게’ 가서는 안 됐다. 그래서 망설였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재차 말했다. 며칠 전에 택배 온 한라봉도 나눠주고 커피도 마시고 집 구경도 할 겸 신혼집에 가자고. 그래서 갔다. 오빠네 신혼집이 아닌, 얼마 전 결혼한 동갑내기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기분으로.
결혼 전 신혼집을 구했을 때 엄마랑 가본 이후로 첫 방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빠가 연애 중에 선물했던 커다란 라이언 인형과 잠만보 인형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달 전 텅 비어있던 집안은 가구와 가전으로 가득차있었고 가득 채우기까지 하나 하나 고르고 배치했을 모습이 그려져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만의 공간은 어느새 두 사람의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부럽다.)
집안 곳곳을 구경시켜준 그녀는 나를 푹신한 소파에 앉히곤 웨딩 촬영한 사진이 나왔다며 앨범을 보여주었다. 하트 뿅뿅 눈으로 사진 속 우리 오빠를 보는 동갑내기 친구가 생기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우리는 현실 남매다.) 수다를 떨고 집을 나서기 전, 그녀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카페의 디저트를 가방에서 꺼내 건넸다. 오빠가 퇴근하기 전에 혼자 다 먹으라는 말을 덤으로 남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마 속 아가씨와 새언니는 참 불편한 사이던데, 우리는 꽤 편한 사이가 됐다. 어느 한쪽이라도 상하관계를 형성하려고 했거나 괜한 기싸움을 했다면 아마 서로 많이 불편해 했을 거다. 앞으로의 관계와 호칭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자가 들어가는 나(시누이)를 편하게 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기에, 내가 아직 깨지 않은 퀘스트를 먼저 깨고 있는 그녀가 새삼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동갑내기 친구를 만들어준 오빠에게 고맙다고 전해야겠다.
엄마들에게 비밀로 해야 할 것만 같은 우리 사이를 이야기하자 엄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친구 생겼다고 생각하고 친하게 지내." 그리고 한마디 더. "그래도 언니는 언니다~" 버럭 할 줄 알았던 엄마가 그저 웃기만 한다. 의외의 반응이기도 하고 엄마다운 반응이기도 하다. 엄마도 나처럼 곧 그녀에게 푹 빠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