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이회영' 그리고 '헬조선'
살랑살랑 불던 봄바람도 궂은 회색빛 하늘도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나흘 간의 연휴는 조용하면서도 차분했다. 가족들과의 외식 때 말고는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였지만 못봤던 영화도 챙겨보고 책도 살짝 들춰봤다. 낮잠도 자고 멍도 때리다가 가끔은 앞으로의 일상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갑작스런 여유가 적응이 안되는지 연휴 내내 코감기가 더 심해졌다. 몸은 다소 회복한 듯 싶은데 출근길은 편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사회생활의 고단함은 정신력 소모에서 비롯되니까. 금세 또 바닥나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이 글을 수정하는 월요일, 어김없이 체력이 바닥났다.)
이번에도 많은 걸 채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이야기들은 삶의 자극제가 되곤 한다. 연휴기간 동안 흥미로웠던 역사 이야기들이 있었다. 가끔 친한 사학과 형과 주고 받던 말로 서로 과를 반대로 갔어야 하지 않았냐는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그 만큼 역사 분야에는 조금 관심이 있다. 물론 많이 알아서 그런 건 아니고 단지 흥미롭게 느낄 때가 많아서다. '아재'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론 한국사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단순한 사실보다는 이전엔 몰랐던 뒷이야기나 비화가 재미지다. 요즘 읽고 있는 '조선과 이웃나라들'이란 책도 그러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비록 19세기말 외국인의 눈에 담긴 조선에 대한 풍경 묘사가 다소 지루하긴 히지만 아직은 흥미롭다.
먼저 영화 '동주'를 인제야 봤다. 윤동주야 워낙 유명한 시인이니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그의 죽음도 익히 들어왔기에 새로울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유년시절 송몽규에게 느꼈을 열등감, 단지 시(時)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의 소망 등이 짓밟혀가는 과정을 흑백의 영화는 너무나 찬란하게 담고 있다. 극 후반부에서 몽규가 같이 도망가자고 할 때 동주는 자신의 시집 출간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접지 못한다. 결국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마저 그에겐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부끄러움과 참회의 시는 사후에 빛을 발하지만 그는 이미 죽고 없다. 시대가 암울해 차마 꽃도 피우지 못했으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청년 윤동주의 이야기가 공감가고 아프게 다가왔다면 이회영, 이시영 6형제의 일대기는 범접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한국사 강사 설민석씨의 특강으로 듣게 된 그들의 이야기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항복의 10대손으로 현재가치 600억의 재산을 과감히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에 쏟아붓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쓰며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던 그들. 춥고 배고픈 먼 땅 만주에서 독립만을 꿈꾸며 버텼던 그야말로 의인들의 이야기였다. 사는 시대가 고단하면 개인이 지키기 힘든 가치가 분명 있을텐데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누구나 이런 핑계, 저런 합리화로 하나씩 타협해 나갈 시점에 원래의 초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6형제는 그것을 지켜냈다. 그들을 만주로 이끈 힘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독립만을 바라본 의연한 초심일까.
이것저것 보다보니 어느새 연휴도 저물어 갔다. 연휴의 마무리는 SBS 스페셜이었다. '헬조선과 게임의 법칙 - 개천에서 용이 날까용?'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 점점 지쳐가는 우리 '이무기'들을 조명했다. 동주처럼 시집을 내겠다는 꿈도 아니고 개천에서 용 한 번 되보자는 거창한 포부도 이젠 없다. 단지 지금의 학자금 대출이, 집값, 월급, 그리고 일자리가 목을 죄어오고 있다. 허덕이는 청춘들을 바라보는 중장년층의 곱지 못한 시선도 담았다. 분수에 맞게 살아라, 눈을 낮춰라, 노력하면 된다, 그들의 채찍질은 아프고 따갑다.
조금은 보듬어주는 우리 어른들의 관용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독립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끝까지 투신했던 이회영 선생처럼 시대의 파격은 때론 윗 사람, 상류층에서 시작되곤 한다. 분명 그들의 움직임은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더욱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시대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정치건, 경제건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이 어쩌면 '우리 어른'들의 변화에서 싹틀 지 모른다. 청년들이 '헬조선'이라 자조하며 깔려있는 이 우울함을 타파하는 힘은 결국 누군가의 작은 변화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취업, 결혼, 연애 등 우리 청년들이 소망하는 건 정말 동주의 꿈처럼 헛되기만 한 걸까. 불안한 이 시대에 '윤동주'로 살아가며 내일은 좀 더 나을거라 작게나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