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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Jan 05. 2024

사랑이란 단어 없이 사랑을 말하는 방법

사랑을 느끼게 한 대화라니, 이건 위험한 주제다. 표현된 사랑은 유효한가? 사랑의 표현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떤가. 사랑이 전해지면 받아야 하는가. 사랑이 담을 수 있는 건 뭔가. 사랑은 뭔가. 사랑의 표현이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


표현하는 사랑은 대부분 반응을 요구한다.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 줘. 그건 사랑이 갖는 무조건성, 절대성을 해치는 일 아닐까. 말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사랑은 개봉된 순간부터 변질되는 식품 같아서. 존재를 담아내는 사랑의 대화를 나누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일정 정도의 온기, 포용, 기대 같은 걸 담은 대화를 ‘사랑의 대화‘라고 하기엔 어렵다.


대신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떠오른 한 문장, ’ 사랑이란 단어 없이 사랑을 말하는 방법.’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이번 주제를 대신하고 싶다.


<헤어질 결심, 사랑이란 단어 없이 사랑을 말하는 방법>


사람의 마음 중 가장 불가항력적인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이 유해한 것일수록 더욱 불가항력적이다. 존재의 붕괴를 가져온다. 해준과 서래가 처음 만났을 때, 붕괴는 이미 시작되었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은 눈빛만 마주쳐도 알아볼 수 있다. 둘의 사랑이 왜 시작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아서 그 '붕괴'라는 단어가 더욱 납득이 된다. 어떤 사랑은 마음을 방비할 틈도 없이 무너뜨리고 들어와 버린다.


"제가 왜 서래 씨를 좋아하는 줄 알아요?


서래 씨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꼿꼿한 자세를 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저는 그게 서래 씨에 대해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형사가 된다. 상대의 작은 몸짓과 눈짓에서도 수많은 단서를 읽어내고야 만다. 말 한마디 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대화를 나누게 하는, 그 작은 의심과 관심의 불씨가 서로에게 지펴졌을 때. 나는 저 대사가 해준이 사랑이란 말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방식이라고 느꼈다. 그냥 '사랑해요.'라는 말은 '서래 씨는 몸이 꼿꼿해요.'라는 말에 비하면 너무나 평평하다.


파도는 각기 다른 속도로 온다. 해준은 너무 이르게 헤어진 사람, 서래는 너무 느리게 헤어진 사람. 사랑은 지속적인 오해다. 서로의 사랑의 모양을 알아보지 못하고, 각자 다른 파도에 떠밀린다.


서래의 살인의 증거가 될 핸드폰을 멀리멀리 깊은 바다에 버리라는 것이 해준의 사랑이라면, 피 냄새를 싫어하는 해준이 사건 현장에 왔을 때 괴로울까 봐 피냄새를 지우는 것이 서래의 사랑. 왜 사랑은 이렇게 다른 꼴인 걸까. 사랑이 시작될 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단서였는데, 사랑이 끝날 때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불가해하다. 해준과 서래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사랑의 은유 같다. 어떻게든 해석하고 싶었던 상대의 말이, 결국엔 영원히 알 수 없는 외국어 문장으로 남는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했던 말."


"내가 언제 그랬어요? 아오, 답답해 진짜! “


해준은 서래에게 직접 사랑이란 단어를 담아 고백한 적은 없다. 서래는 그에게서 사랑을 보고 들었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그 고백들은, 만조 뒤의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다. 분명 있었는데 없었던 일처럼.


서래가 모래구덩이에 들어가 조용히, 차오르는 물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그녀의 헤어질 결심을 본다. 양복차림으로 이포의 바다를 헤매는 해준은 헤어졌지만 정작 헤어질 결심은 한 적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서래 쪽이 품위와 긍지를 지키며 이별을 받아들인다.


사랑이란 말없이, 사랑을 아름다운 잉크로 번지듯이 그려낸 영화다. 둘의 관계는 이포에서 피는 곰팡이처럼 추하기도 하고, 또 이포의 막막한 바다처럼 아름답기도 하다. 오랜만에 굉장히 입체적인 영화를 본 느낌이다. 불가해하고 불가항력적인 사랑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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