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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Feb 20. 2024

직업적 연애인

연인에 대한 세계적 석학이 되는 일

 나는 직업적 연애인으로, 사랑꾼과 다르다. 사랑꾼은 사랑에 재주를 부리는 자이지만, 직업으로서 연애인은 연애를 통해 자아 탐구와 적성 추구를 하는 자이다. 나 생활이 잘 굴러가기 위해 연애에 프로 의식을 갖고 종사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연애 상태였다. 연애 상태라는 말은, 연애 전의 탐색 및 준비 시, 연애 이후의 재활 시기를 포함한다. 선택을 거듭하며 연애 이력서의 경력란이 길어졌다.

 

 직업적 연애인의 길을 추구하게 된 것은 첫째, 연애가 내 적성에 맞기 때문이다. 파도 위로 부서지는 해변의 윤슬, 도쿄의 낡은 재즈클럽 테이블의 벗겨진 페인트 자국과 같이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 느껴지는 무용한 것들을 사랑한다. 아름다운 것은 오래 멈춰 서서 바라본다.

연애는 타인의 작고 하잘것없는 면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팔목의 오래된 화상 흉터의 얽은 자국, 옆구리의 깨만큼 작은 점, 사라지지 않은 꼬리뼈의 몽고반점, 유독 튀어나온 서너 번째 척추뼈 같은 걸 오래 어루만지며 그 사람의 인생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절판된 책을 읽듯 연인의 인생을 읽고 밑줄을 긋고, 각주를 남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도서관을 마음껏 탐독한다. 나의 연인이 아니면 아무 의미 없을 흉터와 주름이 해독이 필요한 아름다운 상형문자가 된다. 바리스타는 뜨거운 머신에 화상 입는 일이 일상이구나, 커피를 내리는 일은 어깨를 혹사하는 일이구나.

 당신 인생의 무용한 이야기들이 다시 쓰여 소중한 책이 되어 내 안에 꽂힌다. 예민한 감각으로 연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참말로 적성에 잘 맞다. 연인에 관하여 세계적 석학이자 권위자가 되는 것, 너무 좋다. 가족과도 친구와도 할 수 없는 건, 섹스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둘째, 연애가 인생의 해상도를 높여준다. 연애를 통해 취향과 자아에 대해 선명해진다. 연애를 목적으로 타인에게 나의 내밀한 신화를 들려주며 이성에게 맺힌 나의 상을 통해 나를 재정의한다.

연애 탐색기의 이성들은 대부분 나를 보고  ‘참 밝고 잘 웃으시네요.’라고 말한다. 나는 타인을 긍정적으로 보고, 잘 웃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오래된 열등감의 산물이라고 여겼다. 열등감으로 패인 음각을 가리기 위해, 양각으로 웃음이 도드라지게 새겨진 것이라고. 대량의 소개팅과 재해석 과정을 통해  긍정성이 내가 가진 크고 자연스러운 힘이라는 게 선명해졌다. 타인과 세상을 긍정하고 타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나의 장점이라는 걸 반복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밝음이 나를 지켜주고, 사람들을 끌리게 한다는 결과다. 나는 내 생각보다 크고 힘이 있는 사람이다. ‘밝고 잘 웃는’ 나라는 사람이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사랑을 주고받으며.


셋째, 연애는 끝없는 재교육의 과정이어서 좋다. 당신을 배우고, 나를 배우고 우리를 배운다. 연애 과정의 밀도 있는 교육을 통해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길을 추구한다.우타다 히카루의 히트곡 love>의 가사에서 “I'll remember to love you taught me how (사랑하는 법을 기억할게요, 당신이 가르쳐준 거니까요)”라는 문장이 계속 나온다. 당신이 가르쳐준 사랑의 방법을 기억하겠다는 다짐 말이다.

사랑의 방법을 모르고 사회화되지 않은 원숭이처럼 사납고 엉망인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연인이었던 설리번에게서 다정하고 안전한 사랑을 배웠다. (그의 실명은 따로 있으나, 헬렌 켈러의 스승 설리번처럼 나를 사회화시켰기 때문에 그를 설리번으로 부르기로 한다)설리번과 집에 돌아왔을 때, 세탁기 바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그 길로 세탁기 앞에 앉아, 젖은 바닥에서 30분을 앉아있었다. 나를 부르는 설리번의 근심 어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많이 신경 쓰여?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 내가 내일 와서 수리기사 부를게. 세상에 맘대로 다 되는 일이 어딨어. 이젠 좀 기분이 괜찮아졌어? 기죽지마~ 같이 올림픽보자." 하고 어깨를 감싸안고,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다독여주었다. 일시적 상황의 균열과 내 세계의 영구적 균열을 구분하는 기능이 없었던 나는 세상의 모든 변수에 날이 섰다. 하지만 설리번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에 입을 맞추자, 마음이 순해졌다.

같은 감정의 파동으로 흔들리지 않아도 사랑이구나, 상대가 흔들릴 때 흔들리지 않는 것도 사랑이구나. 나였다면 함께 패닉에 빠져 감정의 동요로 빠져들거나 더 신경질을 냈을 것이다. 뭔가 하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방식의 사랑도 있음을, 그런 사랑 속에서는 안전함을 배웠다. 날카롭고 예민한 사랑의 세계에 살던 내가 부드러운 사랑을 처음 배운 순간이었다. ‘물’을 배운 헬렌 켈러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서로 더 배울 것이 없을 때 연애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렇게 설리번과의 연애는 수료로 끝이 났지만, 그에게 배운 사랑의 방식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전문적인 연애생활은 내 삶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다. 가장 즐거운 취미이자, 삶의 해상도를 선명하게 하고, 더 나은 사랑을 배우고 싶게 한다. 모든 직업이 그러하듯 연애인도 경력이 중요하다. 책, 영화, 드라마에서 이론을 습득해도 실전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나의 연인들과 함께한 연애 이력서가 그래서 소중하다. 좋아하고 중요한 것을 직업으로 가진 나 제법 맘에 든다. 앞으로도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연애인의 삶을 추구하도록 하겠다. 연애하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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