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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ul 03. 2018

소심한 초능력자들


대학원 후배의 이야기. 심리학과엔 전공 특성상 소심인이 많은데 그녀는 유독 기억에 남아 있다. 작은 체구, 쪽찐 머리, 핏기 없는 하얀 피부, 표정 변화가 적은 얼굴, 거의 열리지 않는 입, 그리고 어딘가 느린 동작이 전반적인 모습이었다. 이따금 입을 열면 그 목소리가 참 작고 얇다. 음식점에서 점원을 부르려면 그녀가 가진 하루치 에너지를 모두 써야 할 것 같았다. 조금만 당황해도 얼굴엔 붉은 노을이 물들고 호흡이 가빠진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소심인의 전형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녀가 떠오를 것 같다. 얇은 테의 안경을 쓰곤 했는데, 안경을 비롯한 단아한 느낌 때문인지 연구소 내에서 그녀의 별명은 ‘안선생’이었다.


안선생에 대한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소리에 대한 예민함이다. 대화를 하거나 뭔가 집중할 때, 혹은 가만히 멍을 때릴 때, 특정 수준 이상의 큰 소리가 나면 그녀의 말이나 행동은 끊긴다. 그 소리에 놀라 그대로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정지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한 번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좁은 길가로 오토바이 무리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멀리서부터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나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떨어진 심장을 줍다가 문득 같이 걷던 그녀를 살폈다. 역시 정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두 뺨으로 뭔가 흘러내린다. 너무 많이 놀라면 눈물이 주룩 흐른다고 한다.



# 자극에 민감하므로 가능한 것들


심리학자 융 Carl Gustav Jung은 성격 특질의 하나로 소심인-대범인(내향-외향)의 개념을 처음 부각하였다. 그에 따르면 소심인은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가 내부로 흐르고, 대범인은 외부로 흐른다. 이러한 구분은 두 성향의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정작 무엇 때문에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 Hans Eysenck는 ‘각성 이론’을 통해 두 성향의 차이를 실제 신체 반응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그는 소심인/대범인이 구분되는 결정적인 차이를 ‘자극에 대한 반응성’으로 꼬집었는데, 이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해하던 개념보다 좀 더 명확하게 소심인의 행동 패턴을 설명한다. 한마디로, 소심인은 자극에 민감하다. 사회적 학습 차원이 아니라 기질적으로 그렇게 유전되었다는 의미다. 관련된 후속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가령 동일한 양의 레몬즙을 혀에 떨어뜨리자 소심인이 대범인에 비해 침의 분비량이 많았다. 피부 민감성 역시 소심인이 더 높았다. 시각 자극으로 인한 동공의 확장, 청각 자극에 대한 반응 등 신체 자극에 기반을 둔 수십여 개의 연구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소심인의 인상과는 조금 다르다. 평소 조용하기 때문에 소심인은 자극에 덜 반응하고 담담할 것 같아 보인다. 반면 활동적이고 여러 자극을 추구하는 대범인이 더 쉽게 흥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이는 유전적으로 소심인이 대범인에 비해 ‘감각 역치’가 낮기 때문이다. 감각 역치는 ‘각성을 일으키는 자극의 최소치’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역치가 낮을수록 사소한 자극에도 더 쉽게 각성된다. 따라서 소심인은 대범인에 비해 평상시 좀 더 높은 각성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환경이나 자극에 대해서도 (보이는 것과는 달리) 더 쉽게, 더 크게 흥분한다.


그럼에도 추구하는 환경이 서로 반대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적절한 수준의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감각 역치가 높아 쉽게 각성되지 않는 대범인은 자극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좀 더 다양하고 강력한 환경을 찾아 나서게 되고, 감각 역치가 낮아 쉽게 각성되는 소심인은 자극이 낮은 환경을 추구하게 된다. 대범인이 사교적이고 파티를 좋아하며, 즉흥적이고 흥미진진한 활동을 추구하는 반면, 왜 소심인은 조용하고 신중하며, 제한적인 상황과 관계를 선호하는지 잘 설명한다. 멋진 풍경을 보았을 때, 대범인은 “와! 대단해! 놀라워! 대박!”이라고 외치거나 타인과 교류하며 스스로의 자극 수준을 더 끌어올리고자 하지만, 고요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소심인의 내면이 더 격하게 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두 기질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소심인의 자극 민감성은 ‘저자극 환경을 견디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는 대범인이 노력으로 얻기 어려운 능력이기도 하다. 자극이 ‘낮은’ 상황을 견뎌내는 것은 자극이 높은 상황을 견뎌내는 것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각 박탈 실험>은 저자극 환경에 강한 소심인의 능력을 잘 설명한다. 피실험자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자극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정해진 시간을 보냈다. 앞에는 네 개의 버튼이 놓여 있는데 원하면 언제든 누를 수 있고, 버튼은 각기 다른 종류의 소리를 들려준다. 실험 결과, 대범인은 소심인에 비해 월등히 많이 버튼을 눌렀으며 소리의 종류도 더 자주 바꾸었다.


즉, 소심인은 고독에 강한 종족이다. 조용한 환경 속에서, 더 자주, 더 오래, 스스로를 다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간은 점차 초능력으로 발현되곤 한다.




# 소심함으로 역사를 만든 사람들


아인슈타인, 뉴턴, 간디, 워런 버핏, JK 롤링, 빌 게이츠 등 소심한 초능력으로 역사를 바꾼 이들이 있다. 이들 모두 조용한 환경을 선호하고 소중한 몇 명과의 집중된 대화를 즐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단하고 외부 환경과 단절된 곳에서 생각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행보도 그렇다. 그는 《향수》, 《비둘기》, 《좀머 씨 이야기》 등의 소설로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음에도 단 한 장의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아 매스컴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상을 받는 것도 마다하고 인터뷰도 거절하곤 한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과 있을 때는 함께 포도주도 마시며 유머를 구사한다. 이따금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한다.


이처럼 소심인은 철학가, 작가, 감독 IT 개발자, 심리학자 등의 분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성공한 그들이 스스로 소심함을 고하는 것이 크게 놀랍진 않을 수도 있다. 현재의 모습 자체가 소심한 성격과 어울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홀로 사색하며 글을 쓰고 코드를 짜고 연구를 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런데 우리가 상대적으로 대범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분야, 예컨대 가수나 배우, 운동선수 중에도 소심한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많다.


가수 서태지를 대표하는 수식어 중 하나는 ‘신비주의’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신비주의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TV출연 등을 자주 하지 않는다. 다만, 가수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음반 제작, 공연은 꾸준히 하는데 평소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축구 선수인 박지성과 지단 역시 마찬가지다. 사석에서는 공을 찰 때의 모습과 다르게 낯을 가리고 말을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 중에는 소심인이 더 많다. 연기를 해야 하는 각본과 상황 외의 변수가 적기 때문이다. 소지섭은 짧은 답변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질문에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라고 답하곤 한다. 그는 원래 말을 유창하게 못 하는데, 그 때문에 건방지다는 오해도 받고는 했다. 심지어 팬들도 소심하다고 한다. 팬미팅을 하면 서로 멀뚱멀뚱 바라만 보기 일쑤. 원빈은 무척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평소에도 과묵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외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데, 조용한 비밀 결혼식은 그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럼에도 원빈은 때론 거친 남자로, 활기찬 대범인으로 스크린을 채운다.


쓰다 보니 왠지 소지섭과 원빈은 굳이 말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배우도 있다. 곽도원은 같이 연기를 시작했던 극단의 그 누구도 그가 배우로서 성공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떨려서 대사도 제대로 못 뱉었기 때문이다. 이종석은 수업 시간에 발표하는 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게 싫어 사람이 많은 자리를 피했고, 심지어 길을 다닐 때도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찾아다녔다. 지금도 연기를 제외한 주제로 인터뷰하는 것을 무척이나 부끄러워한다. 《콰이어트》의 저자 수잔 케인의 TED 강의는 전 세계 많은 이가 생각하는 내향성에 경종을 울렸다. 그녀는 강단에 올라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지만 사실 저에겐 아주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미리 최대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느 연사처럼 훌륭하게 무대를 채웠다.




# 소심한 덕분에 단련되다


이들은 소심인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심했던, 혹은 지금의 소심한 모습을 어렵사리 고백한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어렵사리 얘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행위’이지, ‘소심한 모습’이 아니다. 스스로 소심한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소심한 성격 덕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소심했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은 날카롭게 단련됐다.


다시 대학원 후배의 이야기. 그녀는 내가 아는 가장 소심한 사람이다. 조용했고 나서지 않았으며 어리숙했다. 그리고 그녀는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덕분에 연구실의 규범이 질서 있게 유지되었다. 강한 인내력과 신중함이 있었다. 그녀와의 공동 연구는 좋은 결과를 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뛰어났다. 안선생은 성공적으로 ‘안박사’가 됐다.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고집과 성찰이 있었다. 이따금 입을 열고 나오는 말은 여러 번 떠오를 만큼 유머러스했다. 그녀는 초능력자가 분명하다.


소심인의 초능력을 소개할 시간이다.

당신이 소심인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책을 덮어도 좋다.








《소심해서 좋다》 매거진은 이번 10화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대단치 않은 읊조림에 귀 기울이고 머물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책에 담아두었습니다. 제 글 뭉치가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드릴 수 있길 소망합니다.


그간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더 다가갈 수 있는 글 쓰겠습니다. :)


왕고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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