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잘 안 풀릴 때는 옆 테이블의 두 여인이 하는 대화를 엿들으며 휴식을 취했다. 한 명이 최근에 여행을 다녀왔다며 그곳에서 겪은 일들을 사진 수천 장과 함께 설명하고 있었다. 마치 큐레이터처럼 박식하고 면밀한 진행에 나까지 빨려 들어갔다. 둘째 날 저녁으로 먹었던 와규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있었다고 한다. 군침이 고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세상에나. 아, 그래도 여권은 숙소에 두고 나와서 다행이네. 큰일 날 뻔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일원이 되어 발리의 우붓 마을을 함께 거닐었다. 지갑을 잃어버렸을 땐 혼비백산이 되어 거닐었던 길을 함께 살폈다. 시간이 흘러 여행은 끝이 났고, 그들은 집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큐레이터가 외투를 의자에 걸어둔 채 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저기요. 그 외투는 바닷가 옆 노점상에서 필살의 보디랭귀지로 흥정한 끝에 싸게 샀다며 좋아했잖아요. 생뚱맞은 위치에 박힌 크리스털이 오히려 국내에선 찾기 힘든 느낌이라 더 독특하고 맘에 든다고 했잖아요. 보라색 옷은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데 그게 다 이 옷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면서요. 지금 그 보라돌이가 당신을 떠나가고 있다고요!
나는 엉덩이를 잘게 들썩이며 그녀가 외투를 가지러 돌아올 수 있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마음이 쓰였지만 그것을 들고나가 갖다 줄 만큼의 의지는 생기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돌아와 외투를 챙겨 들고나갔다.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리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맡은 업무의 사수를 소개받았다. 배우 조승우 씨의 얼굴에서 밝은 표정과 혈색, 음영 등을 제거한 듯한 인상이었다. 그가 나를 보며 “잘 부탁해요”라고 말했다. 뭔가 질문을 한다거나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왠지 혈관으로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말투. 앞으로 그와 어떻게 일을 해나가야 할지 걱정이 됐다. 나는 사수에 대한 다른 인상과 단서를 모으기 위해 한동안 부지런히 그를 살폈지만, 첫인상을 넘어설 수 있을 만한 계기는 없었다. 그는 필요한 얘기를 했고, 나는 그것을 잘 메모하며 들었을 뿐이다.
어느 날 싱크대에서 컵을 씻으려는데 지나가던 사수가 외마디로 속삭였다.
“이거….”
“네?”
“지금 틀면 뜨거워요.”
그는 수도의 레버로 손을 옮겼다. 레버가 가장 뜨거운 쪽으로 향해 있었는데 중간 정도로 돌리더니 한동안 물을 틀어놓고는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다소 의아했지만, 별다른 얘기가 없어서 컵을 씻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메신저에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마음을 졸이며 글을 읽어나갔다. 요약하면 이렇다.
‘주방 싱크대는 수온이 매우 높게 설정되어 있어서 가장 뜨거운 상태에서는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자신은) 보통 뜨거운 물을 사용하고 나면 다시 찬물을 틀어놓다가 잠그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 다음 사람이 레버를 중간 수준으로 위치하고 물을 틀어도 굉장히 뜨거운 물이 나온다. 그러니 앞으로 레버가 뜨거운 쪽에 있으면 물을 좀 틀어놓았다가 사용하는 게 좋겠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렇게나 구구절절한 메시지를 보냈다. 저렇게나 엄혹한 얼굴을 하고서는.
소심인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뿐, 사실 상당한 오지라퍼이다.
• 오지라퍼: 오지랖이 넓은 사람. 남의 일에 지나치게 상관하는 사람
주변의 자극이나 맥락에 대한 민감 수준이 매우 높기 때문에 아주 작은 마찰음이나 누군가의 숨소리만으로도 신경을 쓰게 된다. 표현에 신중하고, 괜한 말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를 고려해서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소심인이 입을 열고 무언가를 얘기할 때는 (적어도 말하지 않으면 꽤 위협적인 상황이 생길 것으로 느껴질 만큼)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심인이 많은 공간에서는 이런 각자의 기질을 서로 잘 이해하고 있다. 타인에게 침묵하지만 오히려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오지랖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
는 것.
나의 사수도 침묵의 오지라퍼이다. 절제된 표현이 부사수인 나에게 엄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모습에 주의를 기울였다. 싱크대는 그에게 일정 수준의 위험을 담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 공교롭게도 수도의 레버는 뜨거운 방향이었고 결국 무거운 입을 열었다. 사실 그에겐 꽤나 급박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뿐이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싱크대 앞에서 사람을 붙잡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부지런히 말하진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상세한 내용의 편지를 나에게 보냈을 뿐이다.
사수가 처음으로 기획안을 요청했던 날. 나는 기한 내에 완결성 있게 만들어 전달하기 위해 주변 자료를 샅샅이 찾아보고 정리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그가 바빠서 검토할 시간이 없을까 봐 기한 일보다 하루 먼저 갖고 갔다.
“네. 살펴볼게요. 메신저로 원본 파일 좀 보내주실래요?”
그가 내 문서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잘했다’ 혹은 ‘왜 이따위로 했냐’ 같은 반응은 물론, 문서에 대한 별다른 피드백조차 없었다. 문서의 장단점이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와 다른 업무를 하면서도 내심 그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자신의 자리로 오라는 메시지가 왔다. 그는 내가 작성한 문서 파일을 모니터에 띄워둔 상태였다. 페이지 곳곳에 주황색 박스가 붙어 있었다. 각 박스에는 메모가 들어 있었는데 그 내용에 ‘좋다, 나쁘다’는 없었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 필요’, ‘A안 기준으로 잘 정리하면 기존 전략보다 나을 듯’, ‘이 부분은 제거해도 무리 없음’, ‘앞에 내용과 위계를 맞춰서 요약’ 등 보완에 필요한 조언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는 메모 하나하나를 천천히 설명해줬다. 엄혹한 얼굴을 하고서는.
시간이 지나 누군가의 사수가 되어보니 후배 직원의 문서를 보며 잘했다거나 부족하니 다시 해 오라는 등 한두 마디 뱉으며 상사의 위용을 뽐내는 건 쉽다. 오히려 무엇이 잘되어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상대의 눈높이에 맞게 알려준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꽤 긴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당시 그 사수의 방식은 지금의 나에게 참된 배려이자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자신을 표현하거나 기분을 내기 위해 뱉는 참견이 아닌, 상대를 위한 진정한 오지랖.
자리로 돌아오자 그가 보낸 수정본 파일이 도착해 있었다.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좀 더 보완해주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딱히 칭찬도 아닌 것 같은데, 그 메시지 하나에 왜 그리도 기뻤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