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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un 19. 2018

낮과 밤이 다른 회사


소심한 회사는 낮과 밤이 다르다. 낮에는 묵언수행을 하는 사찰처럼 고요하고 밤에는 그중 몇몇이 슬그머니 입을 연다. 조금 더 살갑게. 그렇게 낮과는 다른 낯으로, 서로를 드러낼 수 있는 회식 자리가 열린다.


“소 닭 보듯 해도 좋은 사람들이에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회사 대표가 했던 말이다. 서로 무심한 것 같아도 다가가 보면 좋은 사람들이니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고 했다. 사무실은 마치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적인 대화 따위는 들려주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의 대부분은 업무에 관한 의논 정도. 누군가의 표정이 필요 이상으로 확장되는 일은 없었다. 회의를 몇 분 앞두고 여럿이 주고받는 대화도 오늘의 날씨, 회의에 대한 주제, 누가 아직 안 왔는지, 의자가 더 필요한지, 헤어스타일이 크게 바뀐 사람이 있으면 “어, 머리가 바뀌셨네요”, “아, 네, 조금”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정말 사적인 교류가 없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 소심한 낮


삼삼오오 사무실을 나가 대화를 하는 무리가 보였다. 우연히 그들이 얘기하는 모습을 봤는데 평소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침묵에 익숙해 보이던 그들은 친한 직원과의 대화에서는 좀 더 풍요로운 표정을 드러냈다. 생각해보면 그들 모두 업무공간에서의 제한적인 느낌과는 다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걸 나눌 대상이 적을 뿐.


그렇게 공적인 침묵 속, 은밀한 교류가 오가는 것이 이곳의 낮 풍경이다. 가깝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일은 없다. 나 역시 그게 편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업무 외적인 대화의 대부분은 메신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신과 가까운 직원에겐 최근 안부를 묻거나, 저번에 준비하던 일은 잘됐는지 등을 묻는다. 오늘 옷이 잘 어울린다거나, 최근 애인과의 사이는 어떤지 등 좀 더 과감한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나 역시 서서히 안면을 익히며 인사하는 직원이 늘어갔고, 어느 날 좀 더 사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직원이 한 명 생겼다. 그런데 그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침묵의 문지기가 삼엄한 경비를 펼치는 낮의 건조함이 아닌, 땅거미가 시야를 가려 조명 빛에 서로를 비추는 밤의 축축함에 있었다.



# 대범한 밤


작은 회식이 열렸다. 그곳엔 대범해 보이는 직원 2명과 나를 포함한 소심인 4명이 있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일주일 동안 입을 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침묵의 소심인이었다.


“자, 배들 고프실 테니 일단 좀 드실까요?”


대범인의 구령에 따라 소심인들의 식사가 시작됐다. 개인 접시를 앞에 놓아줄 때의 짧은 음성이라든가, 어떤 음식을 더 주문할지, 술은 마시는지, 회식 자리가 처음인지 등의 필요성 대화가 어렵사리 말끝을 이었다. 허기가 가시자 그마저도 사라지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 깨주길 기다렸다.


“그런데 대리님, 저번에 만취해서 울 회사의 주사왕을 갈아 치웠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아, 거참, 누구한테 들었어요? 오늘 처음 오신 분도 있는데, 아흐~”


대부분의 관계가 그렇듯, 회식 자리 역시 대범인들의 자기개방과 리드에 따라 자연스레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뜬금없는 농담을 하거나 화제가 될 만한 질문들을 거리낌 없이 던졌다. 내가 어디에 사는지 묻고는 그 근처에 죽이는 막창 집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오늘 처음 봤는데 그렇다면 언제쯤 같이 가는 것이 적당할지 고민하는 찰나, 최근에 본 영화는 무엇인지, 회사 생활은 어떤지 등을 이어서 물었다. 나는 조금은 수동적인 태도로 그들의 질문에 답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답변에는 좀 더 긴 시간과 많은 표현을 더했다. 다른 소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처음 온 자리여서인지 그들도 딱히 뭔가 말하기보다는 ‘아’, ‘음’ 같은 나름의 추임새를 섞어주며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대범인 두 명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는 잠시나마 그 침묵을 즐겼다. 그들이 돌아왔고,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침묵의 길이는 빠르게 짧아졌다.


술 때문인지 혹은 여러 말이 오가는 분위기 때문인지, 어느새 나는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완된 내 모습을 본 다른 이들도 사무실에서의 건조한 모습과는 다른 밝고 활기찬 면면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이 신선했다. 마치 낮에는 햇살을 머금으며 충전을 하고, 밤에는 그 빛으로 스스로를 밝히는 태양광 조명 같았다. 일주일 동안 말 한마디 없던 한 사람 역시 상반된 표정과 말투로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를 ‘침묵 조명’이라고 이름 지었다.


나는 그 자리를 통해 침묵 조명이 나와 같은 전공이며, 재직 10년 차라는 것,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것, 매년 홀로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것, 아이폰 모델을 빠짐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지난 십여 일 동안 몰랐던 사실을 단 몇 시간 만에 알게 된 셈이다. 그리고 왠지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기대감도 생겼다.


나에 대한 질문에도 편하게 답했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 이야기를 했고, 입사하게 된 계기를 꺼냈다. 대화가 춤을 추면서 회사 생활에 대한 느낌도 털어놨다. 이런저런 고충도 말해버린 것 같다. 모두 공감해줬다. 농담도 뱉었다. 침묵 조명에게 조금 짓궂은 말도 해보았다. 그가 웃어줬다. 대범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목소리를 크게 내기도, 와하하 소리 내 웃기도 하며 분위기에 편승했다. 들뜬 입이 쉬질 않았다.




# 대범했던 밤이 지난, 소심한 낮


다음 날 출근을 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제의 나는 평소의 나와 달랐기 때문. 그 모습을 본 이들이 나를 대범인처럼 대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됐다. 특히 전야와는 다른 내 모습에 ‘오늘의 소심인’들이 차갑게 느끼거나 마음을 다치지는 않을지, 그렇다면 나는 그때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할지, 나의 낮은 이제 밤이 되어버린 건지,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출근길에 어젯밤의 직원과 마주쳤다. 침묵 조명이었다. 인사만 간단히 한 것이 충분치 않아 뭔가 다른 말과 제스처를 준비하려는 찰나, 그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아 네, 안녕하세요”라고 속삭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마주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무실의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평소와 같았다. 마치 나 혼자 어떤 꿈을 꾸었던 것처럼 전날 밤의 흥겨움은 그때의 장면으로만 남아 있었다. 대범인 중 한 명이 내 자리를 지나며 “연구원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보기보다 오~! 다음에 또 뵙는 거죠?”라며 큰 소리를 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달래며 “아, 네. 또”라고 답했다. 그는 내 반응에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마치 이런 상반된 상황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오전 일과가 끝날 때쯤 메신저 창이 깜빡였다. 침묵 조명의 메시지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는지요? 즐거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돌아보면 그날 아침이 참 좋았다. 나는 모든 상황에서 편안하기 위해 내가 편해진 상황에서도 더 드러내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하곤 했다. 그래야 내 일관성이 유지된다고 여겼다. 그날 밤 나는 평소 뒷목과 어깨에 뭉쳐두었던 근육을 풀어내고 대범한 시간을 보내버렸다. 술에 기대어 혹은 분위기에 취해 엉성하되 즐거운 모습을 마구 분출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 날까지, 혹은 앞으로도 그것을 ‘본모습’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내가 갖고 있던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이었다. 사회적인 상황에서는 대범해 보여야 한다는, 특히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후에는 “그때의 모습은 어디 갔냐?”는 질문에 대비해야 한다는, 나만의 걱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심하기 때문에 늘 소심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뭔가를 드러낼 만큼의 분위기가 있다면 그것에 기대어 잠시나마 다른 옷을 입어보는 것도 괜찮다. 힘이 빠지는 만큼 빼보는 경험이 즐겁다. 그리고 다시, 내 고향으로 돌아와도 된다. 대범함과 소심함은 동전의 양면이 아닌, 오른손잡이의 왼손 같은 거니까. 


밤이 깊어지면, 슬그머니 왼손으로 밥을 먹고, 글씨를 쓴다.

조명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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