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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Oct 23. 2023

"이루지 못해서 더." 자이가르닉 효과

영화 <라라랜드>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갈 기회가 생겼다. 20대 중반이었다. 마음이 동했고, 관련 책을 사서 읽었다.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언어를 비롯해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워킹 홀리데이를 가진 못했다. 먼저 계획하던 것들, 그리고 이곳에서의 만족스러운 일상을 포기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좋은 기회였지만, 결국 다른 선택을 해버렸다.


아쉬움의 크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졌다. 언젠가 계획한 것들을 이루고 나면 꼭 가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삶은 늘 이전보다 더 주변과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그만큼 기회는 멀어져 갔다.


“여유되면 해보고 싶은 게 뭐예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누군가의 이런 질문에는 늘 빠지지 않고 워킹 홀리데이를 답한다. 여전히 그때만큼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그 자체로 강하게 남아있다.



자이가르닉 효과 (Zeigarnik Effect)

워킹 홀리데이에 대한 나의 기분을 두 글자로 줄인다면 ‘미련’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심리학에서는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다. '이루지 못한 일이기에 더 신경 쓰이고 기억에 남는 현상'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다른 말로는 '미완성 효과'라고도 한다.


이 개념을 만든 학자 ‘자이가르닉’은 인간이 하려던 일을 완성하거나 목표를 달성하면 긴장이 풀려 기억에서 잘 잊히지만 해결하지 못한 일은 내면에 긴장감을 일으켜 자국을 남기고 더 오랫동안 기억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노력할 때 '불평형 상태(Disequili-brium State)'가 된다. 쉽게 말해 일종의 긴장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는데, 만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긴장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자체는 결과가 아니며 성공으로 가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에 더 생생하게 남는다.


자이가르닉 효과의 대표적인 예시는 첫사랑이다. 보통 짝사랑으로 시작해서 끝나버리는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애틋하게 남는다. 시험을 보았을 때 맞은 문제보다 틀린 것들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도 그렇다. 때때로 우리는 성공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두고 이전의 실패를 보완할 수 있는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만큼 미완성과 실패의 영향력은 강력한 셈이다.


따져보면, 부모님께서 '해준 게 없다'라며 늘 신경 쓰고 미안해하시는 이유도 그렇다. 주고 싶은 사랑이 무한하니 줘도 줘도 부족하고 미흡하다고 생각하신다. 모든 부모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자이가르닉 효과를 갖는 게 아닐까 싶다.




영화 속 자이가르닉 효과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사례로는 <건축학개론>의 승민을 빼놓을 수 없다. 15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을 찾아온 첫사랑 서연을 편히 대하지 못한다. 빈정대며 말을 뱉다가 심각한 갈등 상황을 만들고야 만다.


<스쿨 오브 락>의 듀이 핀도 그렇다. 밴드 공연을 하다가 관객을 향해 몸을 던지는데 아무도 받지 않아 바닥에 그대로 떨어진다. 그럼에도 음악을 멈추지 않는다. 주변을 속이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로 밴드를 구성할 정도로 악착같이 음악에 매진한다. 그 성공적인 공연의 클라이맥스에 관객을 향해 다시 몸을 던진다.


<제리 맥과이어>의 제리도 그렇다. 스포츠 에이전시의 엘리트 매니저였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명감이 생긴다. 그래서 투명하고 사람을 아끼는 (동시에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선수 관리 방안을 제안하다가 해고당한다. 홀로 에이전시를 꾸리지만 스타 선수들이 그를 떠나며 큰 실패를 겪는다. 그는 다시 성공하기 위해 사랑까지 포기하며 전심으로 매진한다. 결국 성공을 이루자 비로소 그에게 있던 에이전시 대표로서의 자이가르닉 효과는 사라진다. 자신의 사랑인 도로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우리 중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고르라면 <라라랜드>가 될 것이다.



라라랜드 (La La Land, 2016)

라라랜드는 위플래시로 명성을 떨친 ‘데미안 서졜’ 감독의 뮤지컬 영화다. LA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La La Land라는 단어는 몽상의 세계를 의미하는데. La가 로스앤젤레스를 지칭하기도 한단다.


이 영화의 소개를 보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만난 두 사람은 미완성인 서로의 무대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라고 쓰여있다. ‘미완성’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 라라랜드는 그 중심 내용 자체가 자이가르닉 효과에 닿아있다. 그렇게 총 세 가지의 자이가르닉 효과가 등장하는데, 아쉽게도 그중 두 가지만 이루어진다. 하나씩 살펴보자.



1. 재즈 클럽을 차리고 싶어
- 세바스찬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피아니스트다. 그의 꿈은 재즈 클럽을 차리는 것인데, 그곳에서 ‘진짜’를 연주하며 재즈의 명맥을 잇고 싶어서다. 하지만 세바스찬의 음악은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시급을 받고 연주하던 레스토랑 알바마저 잘렸다. 업주가 시키는 곡을 자꾸 재즈로 변주해서다. 예컨대 ‘징글벨’을 ‘징글베르베르 징그르르베엘’로 연주한다.


“내 인생이 위기인 것처럼 말하는데 난 위기가 좋아. 인생의 펀치를 맞는 것뿐이야. 그러다 코너에 물리면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거지.”


여동생과의 다툼에서 세바스찬은 말했다.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과 열망을 갖고 있다. 꿈으로 가는 과정에서 대중성이라는 현실과 타협하기도 한다. 그렇게 끝끝내 자신이 꿈꾸던 클럽을 차리고야 만다.


그곳에서 사랑했던 옛 여인을 기다리며, 평생 재즈를 연주한다.



2. 배우가 되고 싶어
 - 미아


‘미아(엠마 스톤)’는 배우 지망생이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오디션에 도전하곤 한다. 그녀는 꿈과 현실이 공존하는 일상에서 최선을 다해 보지만 누군가 옷에 커피를 쏟아서, 배역이 맞지 않아서, 아니면 그냥 그 바닥이 냉담해서 번번이 오디션을 떨어진다.


한 번은 2차 오디션의 기회가 생겼다.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대사를 3초도 뱉지 못하고 광탈해 버린다.


“자신의 캐릭터를 직접 써봐요. 걸맞은 역할을 만들고, 허접한 오디션은 쓰레기통에 버려요.”


그녀는 우연한 인연으로 연인이 된 남자 ‘세바스찬’의 권유를 가볍게 듣지 않았다. 재즈에 대한 그의 일관적인 진심이, 연기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도 용기와 위로를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연극을 제작한다.



하지만 그녀가 첫 연극을 하던 날, 그러니까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어두운 실패를 대면한 날, 세바스찬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끝이야. 더 이상 망신 당하긴 싫어. 더 이상 안 해.”


그가 뒤늦게 나타나 사과했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닫은 후였다. 자신에게서도 그리고 이 관계에서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가지 바람을 모두 놓아 버린다.



3.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싶어
- 세바스찬 & 미아


“하겠다는 의지만 갖고 이룰 수 없는 헛꿈 꾸는 사람들 있잖아. 나도 그중 하나인가 봐.”

“오디션은 내일이야. 아침 8시에 데리러 올게.”


세바스찬은 미아가 배우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오디션 연락을 받자마자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어떻게든 오디션장으로 밀어 넣었다. 이별이 코앞에 왔더랬다.


“우린 지금 어디에 있지.”


오디션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그녀가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만약 캐스팅되면 파리에서 모든 걸 쏟아부어야 돼. 네 꿈이잖아.”

“그럼 너는?”

“난 여기 남아서 내가 계획한 걸 해야지.”


둘은 촉촉한 눈으로 아스라이 웃으며 이별을 곁에 두기로 했다.


“언제나 사랑할 거야.”

“나도. 항상 사랑할 거야.”


그렇게 5년이 지났고, 미아는 유명 배우가 되었다. 결혼을 했다. 예쁜 딸을 낳았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장면을 고를 것이다. 세바스찬의 첫 연주가 끝난 후 미아가 다가선다. 그가 지나쳐 갈 듯 빠른 걸음으로 와서는 키스를 한다. 영화의 메인 멜로디가 터져 나오고, 그렇게 둘의 행복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곳엔 실패가 없다. 미아의 첫 무대는 찬사를 받고 세바스찬의 음악 인생도 반짝 빛이 난다. 둘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운다. 행복하고 또 행복한 시간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두 사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아는 남편과 함께 우연히 세바스찬의 공연장인 셉스(seb’s)에 들어섰다. 객석의 그녀를 발견한 세바스찬은 잠시 작동이 고장 난 로봇처럼 멈춰있다가 이내 숨을 내쉬곤 피아노 앞에 앉는다. 둘의 추억이 담긴 곡을 연주한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갔다.


미아와 세바스찬. 이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행복한 미래를 쏟아내는 마지막 장면은 자이가르닉 효과, 그 아쉬움의 크기를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고야 만다.



미완성의 의미


우리 중 누구라도 자이가르닉 효과를 품고 살 것이다. 이것은 미련으로, 아련함으로, 불안으로 삶에 존재한다. 하지만 자이가르닉 효과에는 이면이 있다. 그것을 이루게 되면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어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실패나 미완성은 사라진 결과가 아니다. 그 자체로 의미를 담고 삶의 일부로 남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모든 걸 이루고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게 된다면, 그 삶은 오히려 무의미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세바스찬은 미아를 통해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예상대로 훌륭한 배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아는 세바스찬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재즈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그것 그대로, 각자의 삶에서 각별한 의미를 남겼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는 슬프지 않았다.


“파리에 가겠구나. 거기 재즈 좋아. 이제 재즈 좋아하잖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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