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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Sep 13. 2024

여전히 디지털 바다를 헤엄치는 여전한 아날로그인

불현듯 다가온 도파민 시대에서 살아남기


"친구 없는 세상 vs 인터넷 없는 세상. 당신의 선택은~~~?"


딸아이가 물었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밸런스 게임 중 하나란다.


"음, 인터넷 없는 세상."


그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골라지냐며, 아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말했다. 아주 큰 비밀을 알려주는 말투였다.


"딸아, 아빠는 인터넷이 없는 세상에서 왔어."



도파민 시대의 도래

<80년생이 간다>를 연재하며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어봤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점은 기술 발전과 함께 우리의 경험이 점점 더 개인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스마트폰 하나로 희로애락을 얻을 수 있지만, 이는 실제 세상과의 교류를 축소시키는 부작용도 낳았다.


여행지에서 멋진 장면을 눈보다 카메라에 담기 바쁜 사람들, 지하철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에 몰두한 모습은 이제 흔한 광경이 되었다. 그리고 2024년, 우리는 '도파민 시대'라 불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즉각적인 재미가 중요한 이 시대의 주역은, '숏츠'다. 짧고 강렬한 콘텐츠들이 마치 비눗방울처럼 눈앞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어찌나 끊임이 없는지 자기 전에 잘못 이것을 틀었다가는 한두 시간이 훌쩍 사라질지도 모른다. 족히 100편은 넘는 영상을 보았을 텐데, 무엇을 봤나 돌아보면 없다. 비눗방울만큼 가볍다.


영화와 드라마는 1.5배속으로 시청하고, 그 마저도 결말 포함 요약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3분 미만의 이지리스닝 음악이 유행한다. 그만큼 자극과 보상이 간편해졌고, 긴 호흡의 작품을 감상할 필요는 줄었다. 심지어 자막이 없이는 영상을 볼 수 없다. 외국 영상? 아니, 한국 영상!


이것을 선택의 영역으로 봐야 할까. 과연 나는 이것을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시대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만약 스마트폰이 거대한 음모를 숨기고 있고, '인간들이 더 오래 자신을 보도록 하는 것'이 그중 하나라고 상상해 보면, 만약 그렇다면 그 계획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신이 설계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싶은 분이 얼마나 되십니까?”


한 연사가 청중을 향해 물었다. 수백 명의 청중은 대부분 일류 기술 설계자들이었고, 질문을 던진 연사는 구글에서 약 10년 간 전략가로 일했던 제임스 윌리엄스 James Williams였다. 강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손을 든 사람은 없었다. 단순한 질문이었다.


아이폰 공동 개발자인 토니 파델 Tony Fadell은 종종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난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에 뭘 내보낸 거지?" 그는 말했다. "사람들의 뇌를 날려 버리고 재설정하는 핵폭탄을 만든 건 아닐까."


그들은 사이버 공간 그리고 그곳의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스마트폰에 대해 우려를 품고 있다. 나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그 우려가 딱히 틀린 것 같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스마트폰을 '선택적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양한 길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을 고민하고 선택한다. 하지만 이제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을 제안하는 존재가 늘 곁에 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는 일만큼 간편한 선택은 없다. 이미 손 위에 있는 게 아니라면.


소셜미디어도 이런 스마트폰의 음모에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쏟게 만들어서다. “SNS는 우리가 화면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는 시간만큼 돈을 벌며, 우리가 화면을 내려놓을 때마다 돈을 잃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이것을 단순히 자제력의 문제로만 보긴 어렵다. 더불어 내가 놀라운 자제력과 고집을 갖고, 빌런인 스마트폰의 음모에서 잘 벗어난다고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라나는 아이들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내가 살고 있던 세상으로 왔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그들이 있는 세상으로 온다. 나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그들을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13세 ~ 17세 아이들은 깨어 있는 동안 문자 메시지를 평균 6분에 한 개씩 보낸다는 통계가 있다. 이 통계는 단순히 문자를 많이 보내는 현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화보다 문자를 더 쉽고 편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한국의 초등학생들도 그렇다. 채팅 용어를 현실에서 사용하며, 전화받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거나 두려워하는 이들도 많다. 턴 방식이 아닌 아날로그 기반의 연속적 대화에 대한 부담이다. 그래서 핸드폰을 진동도 소리도 아닌 무음으로 해둔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은 특히 아이들에게 두드러진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2012년 이후 아동 청소년 정신질환은 급증했다. 2020년 기준, 우울증을 겪는 여자 아이(12~17세) 비율은 25%였다. 이는 10년 전인 2010년에 비해 1.5배 증가한 수치다. 남자아이 같은 경우도 10%로 동기간 대비 1.6배 증가했다. 소셜 미디어 사용 시간이 길수록 우울증 확률이 3배 이상 높아졌다. 페이스북의 전 성장 담당 부사장인 차마스 팔리하피티야 Chamach Palihapitiya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이스북이 너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저의 자녀에게는 그 쓰레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요."


영화 <월 E>가 떠올랐다. 그곳의 인간들은 완전히 자동화된 세상에 산다. 눈앞의 화면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일이 명령으로 해결되니 손도 까딱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신체 기능은 신생아 수준으로 퇴화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넘어진 것도 모르고 자신의 화면 속에서 그를 찾는다. 영화를 보았던 2008년 경에는 놀랍고 우스운 장면이었는데, 지금은 그리 어색하지 않은 느낌이다. 친구와 인터넷 중 선택을 고민을 하게 되는 세상이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는 어느새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 들어와 버린 건 아닐지.




여전히 디지털 바다를 헤엄치는 여전한 아날로그인

라테는 주머니에 열쇠, 지갑, 동전이 있었다. 깔끔한 이들은 그에 손수건을 더했다. 미팅이 많거나 항시 메모가 필요한 사람은 작은 수첩도 넣는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을 대체한다.


주머니를 채운 이 새로운 존재는 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간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오래 고민하고,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런 능력 덕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단순히 생존을 넘어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풍요로운 내면세계를 만든다.


다만 이 생각의 과정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마치 지구력처럼 긴 시간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근육이 있어햐 하는 것이다. 짧은 자극에만 익숙해지면, 보상 자극에 따라 버튼을 누르는 실험 속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런 시대에서 꼬장꼬장하게 독서의 중요성만을 강조한다거나 멍을 때려야 한다고 고집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나 역시 바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스마트폰으로 다듬을 것이고, 수정을 마친 후에는 쇼츠를 켜거나 카톡을 보게 될 것이다. 딱히 볼 게 없으면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는다. 그런 다음 다시 그것을 꺼내서 할 게 없나 찾을 것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기억이 걱정을 놓을 수 없게 할 뿐이다. 그것은 아날로그 시대의 경험이다. 손 끝의 편의보다 멀리 있고, 즉각적인 영상보다 오래 걸리지만, 무엇보다 깊고 진하게 남아 나를 구성한다. 그곳으로부터 온 나는, 그래서 딱 그 정도의 걱정을 품고, 오늘도 이 디지털 바다를, 도파민 시대를 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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