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워커홀릭일까
매주 수요일, 동료들과 하나의 주제를 두고 대화를 나누곤 한다. 돌아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시간이다. 최근 주제는 '내가 생각하는 워커홀릭'이었다. 나눈 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생각하는 워커홀릭은,
일 얘기 밖에 할 게 없는
희로애락이 모두 일에 있는
일에 대한 성과로써만 자신을 증명하려는
업무에서 부족한 부분이 없어야만 편안해지는
결과에 대한 강박을 가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일인 사람
일상의 모든 사건을 항상 일 중심으로 해석
업무와 일상의 구분이 안 되는 상태. 그런 상태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상황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일과 맞바꾸는 사람 (지인과 약속, 수면 등이 후순위가 됨)
저마다 표현은 달랐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워커홀릭은 '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람'을 뜻하며 일종의 조롱을 담고 있었다. 가까운 지인에게 워커홀릭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불쾌했다는 경험담도 있었다. 일은 돈의 벌기 위한 수단인데 그에 빠져서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게 미련하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으며 두 가지 관점에서 놀랐다.
첫 번째는 워커홀릭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보다 놀라운 두 번째는 나에겐 이들이 워커홀릭에 매우 근접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일에 대한 의지와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굉장히 강하다. 소위 '열일'을 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였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하나 같이 역할에 몰두하고 심지어 잘하는 능력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워커홀릭은 나쁘단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 모순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문득, 내가 워커홀릭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워커홀릭, 예전과는 다른
나에게 워커홀릭은 소위 '일잘러'의 이미지였다. 팔꿈치 부근까지 걷어진 소매, 뭉텅하게 묶은 머리, 커피 컵을 몇 개씩 쌓아두고 몰두하는 미간, 고요 속에서 신속하게 진자운동을 하는 눈동자 같은 것들 말이다. 도시의 빠른 변화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즐겁게 웃으며 떠들다가도 금세 일모드 들어서는 반전미를 가진 사람들. 프로 의식을 가진 존재.
워커홀릭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갖고 있던 이유는 그 용어가 태동한 시기 때문이다. 워커홀릭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1980년 대에는 일 중독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적 기조가 강했다. 꼭 어딘가에 귀속돼서 하는 노동이 아니더라도,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 학업 등 진취적인 태도를 중히 여기는 것이다. 놀거나 쉬기 위한 시간은 사치에 가깝다. 무한경쟁의 사회인 대한민국이 가진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워라밸, 번아웃'과 같은 표현들이 등장했다. 일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는, 그것은 결국 일상에서 실현된다는 의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워커홀릭 태동기의 시대가 남긴 이미지를 유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워커홀릭의 의미와 유형
그런데 '워커홀릭'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정의를 보면 그것이 본래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워커홀릭(Workaholic):
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상생활이 희생되고 있는 상태.
* 어원: 일(work)과 알코올 중독(alcoholic)의 합성어
정신의학계에서 워커홀릭을 질병으로 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제학자 'W오츠'에 의해 현상적 특징이 정의되었다. 그 특징에 따르면, 이들은 경제적인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며, 일과 자신을 동일 시하여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도 낮아진다고 여긴다. 따라서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우울이나 불안감을 느낀다. 결과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하다. 대체로 앞서 팀원들이 얘기한 이미지와 일치한다.
이러한 특징을 유형에 따라 나눠볼 수도 있다. 총 네 가지인데 만약 내가 일 중독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중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지 따져보는 것도 좋겠다.
"일하기에도 부족한 게 시간."
전형적인 워커홀릭 유형이다. 밤낮,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특징을 갖는다. 고로 취미나 여가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만큼 업무 성과가 좋은 편이고 회사와 주변의 신뢰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더 업무에만 매진하게 만들어 자신의 감정이나 컨디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게 해소되지 못한 감정과 피로가 쌓여 남은 에너지가 바닥을 보일 때가 돼서야 비로소 소진되었다는 알게 된다.
십수 년간 사회에 떠다니면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유형이다. 나 역시 지속형 워커홀릭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이런 유형의 또 다른 단점 중 하나는 동료에게 위화감을 준다는 것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도 스스로를 나태한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유형의 리더라면 그가 구성원들에게 만드는 긴장감은 꽤나 팽팽할 것이다. 어쩐지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선배보다 똑게(똑똑하고 게으른) 선배가 낫다'는 농담이 떠오른다.
"티끌 하나까지도 신중하게."
이 유형의 특징을 한 단어로 줄인다면 '음미'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 그것을 음미하듯 세밀하게 대한다. 예컨대 선택의 결과를 미리 숙고하고, 혹시 모를 문제를 대비하여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진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이며 그 시간의 사용을 달갑게 여긴다. 따라서 결과의 완성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의 효율과 우선순위를 따지기 보다 그저 일을 꼼꼼하게 하는 것에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동일한 작업 단위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늘 더 많은 에너지를 들인다.
왠지 드라마 <미생>의 대사 "취해있지 마라"가 생각난다. 물론 이는 감정에 대한 표현이었지만, 어떤 상황을 멀찍이서 보지 않고 그 심연까지 몸을 담그고 부유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이다. 술에 취해 같은 말을 반복하듯, 주어진 상황을 반복적으로 뜯어보며 나만의 나노 단위 메커니즘을 실현하는 것이다.
"지루한 건 참을 수 없어."
이 유형은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는데 그 과정에서 일의 가짓수를 가용 범위 이상으로 늘리게 된다. 대체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갖고 있으며 충동적이다. 추진력도 높아서 아이디어가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행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벌려 놓은 일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지만, 다소 분산돼 있어 개별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이런 과정의 반복으로 성취감은 낮아지고, 그로 인한 부정적 감정을 채우기 위해 다시 새로운 일을 벌이는 악순환이 지속된다.
문득 '주의력 결핍형' 리더와 '감상형' 팀원들이 만나면 누구 하나는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더의 무분별하게 추가되고 바뀌는 미션 속에서 감상형 팀원은 영혼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으며 임한다. 하지만 어느 과업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새롭고 새로워서, 새롭기 때문에 멋진 과업들이 계속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주의력 결핍형 리더는 업무 결과를 기다리다가 답답해서 수명이 줄겠지.
"벼락치기는 정말 짜릿해"
이 유형은 '지속형'처럼 24시간 일에만 가동되지 않는다. 기한이 정해진 업무를 긴장감 속에서 최대한 미룬다. 기한이 임박했을 때야 벼락치기를 하듯 비로소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얼마 안 남은 시간에서 비롯되는 부담과 몰아치는 업무의 피로를 버티며 일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문제는 일의 기한이라는 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처럼 예측 가능한 시점에 독립적으로 박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변한다. 겹친다. 변하며 겹친다. 그런 상황이 족히 수년간 지속되기도 한다. 그 긴 시간 동안 치는 것을 벼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벼락-지속형' 워커홀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유형은 여러 가지지만 따져보면 공통적인 증상이 있다. '자신을 살피지 않고 업무에 임하며, 그 시간을 지속한다'는 것. 쉬어야 할 타이밍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강행한다. 피로의 누적이 회복의 탄력을 압도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마침내 번아웃에 이르게 된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
워커홀릭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들이 있었다. 최근 얻게 된 병이 그렇게 보낸 시간들의 결과인가 싶어서 속이 쓰리기도 하더라. 하루하루 꽉 채우다 보니 그 성취감의 이면에서 더 무서운 게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팀원들과의 대화로 돌아가서, 이들의 특정 모습만 본다면 워커홀릭처럼 보인다. 일을 맡으면 그것을 지속하고 음미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션을 달갑게 여기며 프로젝트의 말미에는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폭발적으로 수명을 갈아 넣기도 한다. 이 같은 태도가 실제로 훌륭한 결과를 견인하는 것도 사실이다. 팀원 중 누군가의 말처럼 "워커홀릭이 있음으로써 아무도 끌고 가지 못하는 일을 한 스텝 전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워커홀릭이 아니다. 최소한 그것을 경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취미와 퇴근 후 삶이 있다. 가족 및 지인과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점심 메뉴에 대한 기대감으로 월요병을 물리기도 한다. 야근을 막기 위해 중요한 약속을 퇴근 후에 잡아두고 스스로의 업무 폭발력을 만들어 내는 지혜도 있다. 몰입과 열정을 아끼지 않지만 존재 가치는 사무실 밖에 둔다.
열심히 일하기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 같다.
이들을 보며 더 나은 세대가 가진 현명함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