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수백만 원을 내. 그렇게 10년을 살아." 친구 P가 분위기를 고조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인 후 마지막 대사를 이었다. "그런데 아직 빚은 반의 반도 못 갚았어."
대단한 밑천 없이 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대화였다. P는 두 아이의 아빠였는데, 만약 필요한 만큼 대출을 받을 수 있고 무리해서 자가를 얻었을 경우 일어날 일에 대해 얘기했다. 한때 자신의 월급에 해당하는 수준의 돈을 매달 은행에 내야 하고, 그렇게 10년이 지난 후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P가 자신의 감상이자 결심을 말했다.
나는 돈욕심이 많지 않은 사람에 속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돈에 환장한다고 하던데...) 갖고 싶은 게 딱히 많지 않다. 다만 갖고 싶은 게 생겼는데 주머니가 할랑해서 참아야 할 때, 문득 여행을 가고 싶은데 곡간에 쌀보다 먼지가 많아서 진정해야 할 때, 딱 그 시점에 필요한 돈에 대해서는 갈증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돈 자체를 왜 모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어떻게 모아야 넉넉한 생활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도 적다. 최근 친구의 권유와 도움으로 이런저런 투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계좌는 점점 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되고 있다. 분명 있었는데, 열어보니 없다. 대략 그렇다. 만약 당신의 주변에 그냥 하루하루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는, 경제적 지식이 빈약한 부류가 있다면 그 사람이 나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P의 말에는 깊이 공감했다. 웬만한 노력으로는 내 집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하루하루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다간 그 위치가 길바닥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집을 소유하는 선택을 하려면 인생 전반에서 꽤 많은 부분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 그것은 나의 셈법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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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뉴스 기사에서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제목을 보았다. 이에 해당하는 세대는 8~90년대 생이다. 풍요의 시대에 태어났지만 저성장의 흐름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고용감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특징이 있단다. 이렇게 다소 광범위한 연령대를 한 세대로, 심지어 부모보다 가난한 사람들로 묶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주거비용 부담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 실거래 공개시스템에 따른 서울 아파트 중위 매매가격은 2017년 기준 6억 2천만 원에서 2022년 기준 10억 9천만 원으로 무려 4억이 넘게 뛰었다. 소득 대비 집값 비율(PIR)이라는 것도 18.4 수준으로 높아졌는데, 쉽게 말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집을 사려면 18년이 걸린다'라는 의미다. 18.
거리엔 저렇게 많은 집과 아파트들이 있는데 내가 살집이 없는 듯한 느낌은, 노력으로 보편적인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을 준다. 이는 결혼 및 출산에 대한 생각에도 꽤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노력하면 내 삶에 집과 가정을 들일 수 있었던 부모 세대보다 가난하다고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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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보다 가난하다'라는 말과 의미를 보았을 때,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첫 번째는 안도감이다. 내가 주택 문제를 어렵게 느끼는 게 내 부족에만 기인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묘한 위로를 받았다. 다음으로는 억울함 같은 게 밀려왔다. 내가 위치한 이 세대적 울타리가 마치 벗어날 수 없는 한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풍요를 누린 윗세대와 개인을 중시하는 아랫세대 사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살지만, 그 모든 세대들은 결국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니 결국 나의 상대적 위치도 늘 같을 것이었다. 나는 지금의 부모 세대가 갖고 있는 수준의 주택을 가질 수 없다. 적어도 지금 수준의 노력으로는 그렇다. 나는 부모보다 월등히 가난한 게 맞다.
그러다가 문득, 내 나이의 부모님이 궁금해졌다. 내가 사회에서 소위 1인분을 하기 시작하던 30대 때, 그들의 삶은 어땠나. 어떤 풍요를 누렸나.
짙은 청회색 철문이 기억난다. 녹이 좀 슬었던 것 같다. 그 안으로는 작은 마당이 있었고, 두 집이 하나의 담벼락 안에서 같이 살았다. 내가 미취학 아동이고 나의 부모님이 30대 중반이었던 시절이다. 그곳은 서울 상도동의 어느 주택이다. 지금은 살고 live 싶다고 살 수 buy 없는 곳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당시엔 그저 좁은 골목을 메우고 있는 낡은 담벼락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 시절에 대한 여러 기억이 있지만 주제에 맞는 걸 고르자면, 마당 바닥은 이곳저곳 갈라져 있었고 겨울이 되면 나는 몇 번인가 연탄을 갈았다. 이따금 머리 위에 고무 바구니를 얹은 할머니께서 갈라진 마당에 발을 들이셨다. 그 바구니엔 여러 생선이 있었는데 필요한 생선을 고르고 돈을 지불하면 그 자리에서 손질해주셨다.
어느 날 골목으로 포클레인이 지나갔다. 좌우의 벽을 긁으면서 갔는데, 집에서 본 그 모습은 마치 타이타닉의 갑판 너머로 움직이는 빙산 같았다. 충돌할 때마다 크고 작은 얼음 조각이 떨어졌다. 다른 어떤 날은 배달원이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좁은 골목을 질주했다. 그 골목에 있던 아이들과 어른들이 내 몸에 닿을 듯 다가와서는 휙휙 사라졌다. "타볼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지금의 시대에서 그 경험을 돌아보면 있어서는 안 될 위험한 일이었다.
하루는 엄마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 음성은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아빠는 가구들을 치우고 뒤집고 밀치고 하면서 우리 집으로 들어선 불청객을 쫓았다. 꼬리가 길고 재빠른 그 녀석은 아빠의 빗자루를 피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도망 다녔다. 엄마는 그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말을 뱉으며 치를 떨었다. "어우, 서생원!"
지금 나에게 그 생활을 하라고 한다면 난감할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현재의 부모님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그들보다 가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같은 나이의 그와 그녀를 떠올리면 지금의 나를 딱히 가난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비할 수 없게 편하고 편리하고 안정적인 환경을 누리며 산다. 여느 삶에나 있는 어려움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이겨내면서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말은 얄밉다 못해 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그들보다 가난하지 않다는 것. 나의 이런 결론은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서 눈을 감아버리는 정신승리일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달리던 누군가에겐 힘이 빠지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런 태도 역시 이 세대가 가진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불편한 심경 속에서도 굳이 좋은 면을 건져 올리는 행위 말이다. 정신승리라는 말이 아직 세상에 존재하기 전, 그것을 긍정적인 태도의 일환으로 취했던 경험, 그 선택으로 인한 작은 성공들이 내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복잡했던 어제로부터 한 줌 빛을 건지게 한다. 어지러운 오늘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