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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Apr 08. 2024

날아라 삐약이

번외편


맞벌이 부부의 자식이었던 나는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열쇠를 밀어 넣고 돌릴 때 들리는 마찰음, 손잡이를 잡고 현관문을 당길 때 빨려 들어가는 바람 소리, 그 바람을 끊으며 닫히는 문의 충돌음, 그것을 끝으로 나의 집은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았다. 발을 떠난 운동화가 지면을 두들기며 잠시 그 고요를 깨뜨리지만 일광이 은은하게 흩어진 거실은 여지없는 적막으로 반길 뿐이었다. 나는 가방만 놓고 다시 밖으로 나가 놀이터를 향하거나 친구의 집으로 갔다. 어쩌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현관문이 닫히면서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집요한 외침 같기도 홀로 부르는 노랫소리 같기도 했는데, 내가 문을 열면서 시작된 것인지 혹은 전부터 계속 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것이든 그 소리는 내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에 외투와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차례로 떨군다. 문을 밀어낸다. 작은 골판지 박스가 있다. 그곳엔 주먹 크기의 생명체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녀석의 이름은 삐약이다. 작고, 노랗고, 하찮다. 학교 앞에는 삐약이와 같은 수많은 병아리들이 여러 상자에 담겨 있었다. 그들은 비좁고 치열한 그곳에서 '나를 좀 보라'며 외치곤 했다. 나를 비롯한 초등학생들은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쭈그려 앉은 채 구경하곤 했다. 하루는 그 박스 안 노란색 구름에 손을 넣었다. 폭신 거리던 그곳에서 와인잔을 대하듯 한 녀석을 들어 올렸다. 녀석은 소나무 가지 같은 발로 여러 번 내 손을 꾹꾹 눌렀다. 마치 나와의 만남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 같았다.


“아줌마, 얘 주세요.”



결국 저질러 버렸고, 저녁에 엄마의 호통 페스티벌이 이어졌다. 그렇게 녀석은 ‘삐약’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가족이 되었다. 병아리의 아이덴티티에 맞는 귀여운 이름이었는데 정작 울 때는 그것과 달리 ‘이얍’이라는 소리를 냈다. 이얍이얍이얍 이따금 이엽이욥 이얍.


삐약이 덕에 집에 가는 게 즐거웠다. 하굣길 나의 걸음은 더 이상 터덜거리지 않았다. 집에 오면 그 녀석을 상자에서 꺼내 거실 바닥에 두고 엎으려 눈높이를 맞췄다. 녀석은 처음엔 상자밖이 생소한지 제자리에서 이얍이얍 하다가 이내 한두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익히곤 했다. 몇 번은 내 손위에서 눈을 살포시 감고 잠에 든 적도 있었다. 따뜻했고,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삐약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참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기분인지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어느 날 현관문이 닫히며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당연히 들려야 할 소리가 없었다. 가방을 멘 채 화장실 문을 열었다. 욕조 끝 골판지 박스는 침묵했다. 당시 나는 좀 고장 났던 것 같다. 빨리 그것을 열어서 삐약이를 보고 싶은 마음과 조금이라도 천천히 그 안의 일을 마주하려는 망설임이 충돌했다.


다행히 삐약이는 여전히 나를 반겼다. 그런데 마치 아주 심한 독감을 걸린 듯, 손위에 앉아서 눈을 감은채 옅은 소리를 냈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친구의 생명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매일매일 노랗게 빈짝이던 일상이 사라질 수 있음을.


금세 눈물이 났다. 눈 속 어딘가의 둑이 무너진 것처럼 밀고 나왔다. 너무 작아서 안아줄 수도 없는 녀석을 바라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삐약아. 삐약아. 부를 때마다 삐약이는 눈을 천천히 떴다가 감았다.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퇴근 후 집에 오셨다. 삐약이를 보시곤 수건을 겹쳐 접으셨다. 그 위에 삐약이를 두었다. 녀석은 더 이상 몸을 세우지 못하고 쓰려졌다. 그 모습에 나는 기침하듯 울음이 나왔고, 눈을 감자 몇 방울이 이내 떨어졌다. 아버지는 내 요란에 반응하지 않은 채 삐약이의 이곳저곳을 만져보셨다. 신중한 표정이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스탠드등의 갓 부분을 빼내고 삐약이 옆에 눕혔다. 온기를 주려는 의도다. 그런 다음 참기름을 먹이고는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돌아보면 그 모든 시도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 모든 손길에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던 것 같다. 필요한 과정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삐약이는 천천히 멀어져 갔다. 초등학교 1학년, 나는 생전 처음 겪는 상실감에 어쩔 줄 몰랐다. 왕왕 울다가 끄윽 삼키다가 다시 우왁 눈물을 쏟아냈다. 며칠을 그랬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삐약이가 없는 현실을 알아채곤 또 울었다. 지금도 눈물이 많은 편이긴 한데, 생각해 보면 당시에 막대한 양을 쏟아낸 덕에 오히려 덜한 것 같기도.


어느 날 우연히, 잊고 있던 감정과 함께 떠오른 삐약이의 이야기는 그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로 마무리한다.




안녕, 삐약아.


미안해. 나는 사실 너의 모습을 잊었어. 너무 긴 시간이 지난 탓이야. 그간 여러 일을 겪으면서 나도 무디고, 심술 맞은 어른이 돼 버린 것 같아.


하지만 너와의 시간은 말이지.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꼭 반짝하고 떠오르는 별이야. 내가 상실에 대해 모르던 시절, 그랬기에 모든 마음을 쏟을 수 있었던, 그 시간 속에 네가 있어.


삐약아. 내 안에서 작고 노랗게 빛나는 별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예전처럼 서로의 온기를 나누자.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기를 바라며, 너의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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