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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ul 15. 2024

아이언맨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VI

80년생의 문화 키워드로 시대유감, 1세대 아이돌, 1684, 시트콤, 극장 등을 꼽았었다. 이것은 나에게, 그리고 감히 예상컨대 당시 비슷한 연령대였던 이들에게 꽤 인상 깊고 의미 있는 경험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 속 어딘가에서 존재하며 나라는 일부를 단단하게 구성하는 조각이다.


만약 영화 중에서도 이런 키워드를 고른다면, ‘아이언맨’이 아닐까 싶다.


그 많은 영화 중에서 아이언맨이라니, 왜? 라는 반응이 예상된다. 누군가는 <ET>나 <포레스트 검프>를, 다른 누군가는 <백투더퓨처>나 <인디아나 존스> 같은 키워드를 들이밀고선 "감히 마블 히어로가?"라며 열을 낼지도 모를 일이다. 마블 팬 중에서는 '왜 콕 집어 아이언맨?'이라고 의문을 가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고 만났던 명작도 많지만 이 주제, 그러니까 ‘어떤 시기에 특정한 연령대로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경험‘을 찾는 관점에서는 아이언맨이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를 풀어보겠다.



먼저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개봉한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최종화라고 가정할 때, 2008년 첫 개봉작을 시작으로 약 10년 간 22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각 작품과 개봉 시기는 다음과 같다.


페이즈 I
1. 아이언맨 (2008)
2. 인크레더블 헐크 (2008)
3. 아이언맨 2 (2010)
4. 토르: 천둥의 신 (2011)
5.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 (2011)
6. 어벤저스 (2012)

페이즈 II
7. 아이언맨 3 (2013)
8. 토르: 다크월드 (2013)
9.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 (2014)
10.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014)
11.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5)
12. 앤트맨 (2015)

페이즈 III
13.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2016)
14. 닥터 스트레인지 (2016)
15.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2017)
16. 스파이더맨: 홈커밍 (2017)
17. 토르: 라그나로크 (2017)
18. 블랙 팬서 (2018)
19. 어벤저스: 인피티니 워 (2018)
20. 앤드맨과 와스프 (2018)
21. 캡틴 마을 (2019)
22. 어벤저스: 엔드게임 (2019)


시리즈라 하기엔 각 작품 간의 연속성이 없고, 22편의 영화는 그 자체로 재미있다. 각 작품의 주인공 캐릭터 또한 그 자체로 고유하며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모든 작품은 MCU(Marvel Cinematic Universe)라는 거대한 세계관 내에서 나름의 단서를 남기며 큰 줄기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점점 더 개별 이야기 간 접점이 증가하고, 어느 시점엔가 각 영화를 이끌었던 주인공들 모두를 위협하는 압도적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후반부의 작품들은 그 존재가 도래한 날의 이야기다. 주인공들은 물론 그 사돈의 팔촌까지 한 공간에 모여서 운명에 맞서는데, 그 장면은 지난 10년 간의 작품들이 가히 시리즈였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총체적이고 어마무시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이렇듯 22편의 영화들로 이 거대한 세계관을 알아가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경험이라도 현시점에 그것을 누리기란 쉽지 않다. 일단 22편의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여간 부담되는 투자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볼 수 있는 게 무한히 많아서 보는 것 자체에 노력이 필요한) 넷플릭스 시대와 (모든 것들을 더 짧고 더 빠르게 더 즉시 볼 수 있는) 유튜브 시대서는 더욱 그렇다. 이미 많은 스포일러와 밈들이 존재하며, '마블 시리즈 1시간 몰아보기'로 끝낸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사람을 '굳이' 고르자면, 각 작품의 개봉 시점마다 영화관에서 관람하며 따라온 이들일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끝나면 그 여운과 함께 쿠키 영상을 본다.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후에야 상영관에 불이 다시 꺼지며 나오는 두 번째 쿠키 영상까지 보고는 다음 편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다음 편의 상영일을 기다린다. 예매를 하고 극장을 들어선다 불이 꺼지면서 마블 코믹스의 여러 순간들이 교차하는 거대한 로고가 등장한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다시 그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이다.


아이언맨은 그런 마블 시리즈의 시작이자 끝이다. 2008년 <아이언맨 1>은 10년 대서사의 문을 열었고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I am Iron man."이었다. 그리고 10년 뒤 동일한 대사와 마지막 핑거스냅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가 이 기나긴 시리즈의 시작과 끝이라는 점에 이견을 갖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마블 영화에 대한 완벽한 경험은 초기 개봉작인 아이언맨을 감상했는지가 중요하다. 나를 포함한 80년생은 당시 20대 후반이었다. 그 나이는 상대적으로 학업이나 결혼, 육아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기였으며 '소소한' 근로소득을 얻고 있던지라 영화관을 향하는 발걸음이 다른 시기에 비해 가벼웠다. 그리고 나는 아이언맨으로 칭해지는 그 로봇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 지나쳤던 만화책 어딘가에 마블 코믹스가 있었을 것이고, 오락실 게임에서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80년생도 그가 초면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그 영화를 선택할 확률을 높여주었다.


영화는 로봇과는 전혀 상환 없는 무기 개발자를 비추며 시작하고, 이 개발자는 음습한 동굴에서 최초의 아이언맨을 만든다. 아니, 그건 이름을 붙이기엔 조금 민망한 철깡통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한 무장단체를 박살 내는 괴력을 보여준다. 점차 더 가볍고 견고하며, 옐로 앤 레드의 그것이 되는 과정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언맨을 키워드로 뽑은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성장기에는 다양한 로봇들이 있다. 마징가 Z, 메칸더, 고라이온(손발이 사자 머리!), 고디안(로봇 안에 로봇이라니!), 고드마르스, 그랑조(하... 대지의 테마!), 다간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아이언맨을 보면서 마치 만화 속에서 보았던 그것들이 내가 사는 세상으로 온 것 같았다. 성인이 된 나에게도 차고 넘치는 장면과 이야기로 동심을 자극했다. 마치 (먼저 알던 깡통로봇인) 철인 28호를 실제로 보는 기분이었다.


아이언맨(마크1)과 철인28호


아이언맨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이후 다른 히어로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웠던 경험은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에만 갇혀있지 않는 것이었다. 활자가 책 밖으로 뛰쳐나갈 수 없는 것처럼, 마블 영화 이전까지의 모든 캐릭터는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 내에서 존재했다.


그런데 마블의 영화들을 통해 나는 그 경계가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다른 영화에 나오고, 심지어 여러 영화의 주인공들이 한 영화에 등장에서 서로 인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더 큰 세계관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는 상황은, 정말이지 너무 놀라워서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 놀라움은 뭐랄까. 퇴근 후 집 현관문을 열었는데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소꿉친구와 20년 전에 유학 간 초등학교 절친, 전 직장에서 딱 한번 대화해 본 다른 팀 팀장, 해외여행 중 나에게 어려 보인다고 해주었던 버스운전사가 한 자리에 모여서 내 깜짝 생일파티를 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영화 간의 벽을 허물고 한 자리에 모이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게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빠르거나 혹은 늦게 태어났다면 이렇게 꼭 맞게 모든 순간을 경험하지 못할 터였다. 이젠 기억 속에 남은 장면들이지만 나에게 그것은 영화의 감동 이상의 것이다. 그 모든 경험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아이언맨을 키워드로 꼽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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