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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May 27. 2024

극장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V


처음으로 극장에서 봤던 영화는 <후크>였다. 명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1991년 개봉작으로, 네버랜드를 떠나 성인이 된 피터팬과 네버랜드에서 여전히 해적질을 하고 있던 후크 선장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지금은 고인이 된 '로빈 윌리엄스'가 사회에 찌든 슈퍼 아재 피터팬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후크에게 납치된 자식들을 구출하기 위해 팅커벨을 따라 네버랜드로 돌아간다.


어둠 속에서 거대하게 빛나던 네모 화면은 네버랜드로 돌아간 피터팬의 모험 활극을 실감 나게 전해주었다. 나는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피터팬은 네버랜드에서 잊고 있었던 동심을 하나씩 되찾았다. 나는 그때마다 입을 아 벌린 채 주먹을 꽉 쥐며 기뻐했다. 마침내 피터팬은 예전처럼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황홀함이었다.



당시 극장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형 화면과 웅장한 사운드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공간이나 경험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는 볼록한 얼굴의 두터운 TV가 있었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그 녀석은 극장에 있는 것에 비하면 참으로 하찮았다. 


심지어 주변엔 늘 작품의 감상을 방해하는 변수들이 존재했다. 한번은 장을 보고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왜 불을 끄고 있냐며 거실과 부엌을 밝힌 후 식탁에 장바구니를 놓으셨다. 집안이 일상의 소리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어머니께서 현관문을 여시기 전, 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며 안구 가득 차오른 눈물을 떨구려는 찰나였다.


그렇기에 극장은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서울극장, 대한극장, 스카라극장 피카디리극장, 명보극장 등, 각 극장들은 그만의 고유한 이름과 색채가 있었고 어떤 극장에 가는가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보통 같은 동네(서울의 경우 종로, 충무로)에 모여 있었기에 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낸 후 골라서 가는 재미도 있었다. 극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오징어, 쥐포, 군밤, 고구마튀김 등, 지금의 휴게소에 있는 다양한 주전부리를 팔았다. 그 거리만의 냄새와 설렘이 있다.


현시대에 당시와 비슷한 경험을 굳이 찾자면, 유명한 카페 거리에 가서 그곳만의 특이한 카페를 가보는 것과 비슷하다. 여러 종류의 카페가 주변으로 보이는 그 거리의 전반적인 풍경이 있고, 개중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카페만의 고유한 공간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돈을 주고 취하는 것은 커피지만, 그곳에 가는 이유에 있어선 음료가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엔 어떤 영화인가 보다 어떤 장소로 가는지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 보러 가자는 말보다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있었다. "극장 갈래?"



지금과 당시의 극장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시각적 차이는 영화의 포스터다. 지금은 영화관의 내부에 대형 포스터를 건다. 또한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루는 스크린을 통해 그 예고편 영상들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다. 그런데 당시에는 건물 외벽에 영화의 포스터가 걸렸다. 그것은 인쇄물이 아닌, 누군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서 '아~ 그림은 직접 그리고 글씨는 인쇄물을 썼구나'라는 착각이 들었다면 그렇지 않다. 글씨도 모두 그린 것이다. 초등학교 수업 때 그리던 공익 포스터처럼, 극장 외벽의 영화 소개를 위한 사각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붓에서 탄생했다.


이런 제작 방식의 영화 포스터는 90년대까지 주를 이루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크고 품질 좋은 인쇄물을 출력하는 기술이 현재만큼 발달하지 않아서다. 심지어 그것을 여러 장 인쇄해야 할 때는 비용이나 효율면에서도 매력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직접 그릴 때의 효용이 더 높았던 시절이다.



이런 '직접 제작 방식'의 영화 간판은 그만의 홍보 효과를 가지기도 했다. 작가의 화풍은 앞서 말했던 극장의 특색이나 개성을 표현하는 역할도 했다. 그래서 간판작가는 영화 상영이 결정되면 먼저 그 영화를 봤다고 한다. 어떤 주제나 분위기로 그릴 지를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글씨를 그리는 사람은 따로 있다. 간판의 프레임은 목수가 제작한다. 여러 손을 거쳐 영화 간판이 걸리게 된다.


문득 이런 상상을 했다. 지금은 어떤 영화의 상영이 결정되면 그것을 관람객의 어떤 동선에 놓을지가 중요하다면, 당시엔 이런 말이 오갔을 것만 같다. "작가님, 이번에는 거칠고 어두운 느낌을 더 담아주세요. 막, 막, 포스터를 따악 보면 그 어두침침~한 느낌이 나면서 어? 저들이 왜 저러고 있지? 무슨 일이지? 이런 궁금증이 스멀스멀 피어나게 말이죠."


이따금 개성이 너무 강한, 뭐랄까 입체파 스타일의 작가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간판의 배우는 좀, 뭐랄까. 분명 아는 사람인데, 누군지 모르겠는 느낌. 분명 아는데... 모르는 사람 느낌. 그렇다.



1998년 강변역에 'CGV 강변'이 최초로 개관했다. 이후 대기업 체인의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렸고,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도 시장에 진입하며 전국적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확산되었다.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던 극장은, (‘미성년자’가 아닌) '연소자 입장불가'라는 문구가 보이던 입구, 조조할인, 그리고 세로로 뿌려지던 자막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멀티플렉스로 인해 영상 및 사운드의 퀄리티는 물론이고, 문화적인 의식 수준도 많이 좋아졌다. 이제 극장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앞 의자를 발로 차거나 손잡이에 발을 올려놓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 시작 전 안내와 더불어 극장 내의 다양한 분위기를 통해 그것들을 섬세하게 개선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콘셉트로 만들어 놓은 영화관은 이전처럼 '가는 것만으로' 재미를 주던 극장의 매력을 반감시킨 듯하다. 코로나를 겪으며 영화계가 많이 어려워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멀티플렉스의 이런 면들도 조금의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주던 고유성이 줄어든 것은 아쉬운 점이다. 


얼마 전 삼성역의 메가박스를 갔다. 코엑스몰 내의 화려한 상가들을 거치고 나면 조금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나타난다. 계단식의 휴게 공간과 함께 거대한 스크린이 두 개의 벽을 채우고 있었다. 그곳엔 K팝 스타들의 뮤비가 나온다. 영화는 핸드폰으로 예약했기에 티켓은 없다. 팝콘은 키오스크로 주문했다. 상영관의 쾌적했다. 앞자리의 높이도 그 사이 공간도 아주 적절하다. 좋더라. 왜인지 예전의 설렘은 없더라. 늙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후크에게 승리한 후 가족들과 현실로 돌아온 피터팬. 그는 중년의 나이에 모든 동심을 되찾았다. 그 순간으로부터 약 30년의 시간이 지났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중년이 되었고, 당시 중년이었던 그는 아마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노인이 된 피터팬의 안에 여전히 네버랜드에서의 기억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내 안의 그것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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