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III
1984도 1Q84도 아닌 1684?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것이 연도가 아닌 특정 숫자의 나열이라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1684는 나에게,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처음으로 일어났던 사건을 의미한다. 16강, 8강, 4강. 2002년 FIFA월드컵의 이야기다.
역사는 2002년 월드컵에 대해 '첫 4강 진출 신화'를 주로 조명한다. 하지만 당시의 시간을 직접 보낸 관점에서는 좀 더 많은 '처음'이 있다. 우선 2002년 월드컵은 (일본과의 공동 주최이긴 했지만)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월드컵이었다. 이는 예전에 주최했던 올림픽이나 엑스포 등에 이어서,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과 사회적 인프라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장 처음 일어난 '처음'
2002년 월드컵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던 '처음'은 본선 경기인 폴라드전이었다. 대한민국은 2-0으로 경기를 이겼고, 이는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그전까진 본선인 32강에서 경기를 이겼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뉴스에 대중은 빠르게 뜨거워졌다. 평소 축구를 즐겨보지 않던 이들까지도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더 이상의 승리를 기대했던 이들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 속해있던 본선 D조에는 폴란드 외에 축구강국인 포르투갈이 있었고 미국도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을 제외하면 미국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미국이 이미 포르투갈을 3-2로 이김으로써 엄청난 저력을 보여준 상황이었다. 누군가 "2위 자리? 바랄 걸 바라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로써 16강 진출 팀은 포르투갈과 미국으로 굳혀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대한민국이 미국과의 경기를 1:1로 무승부로 끝낸 것이 아닌가! 이로써 각국의 승점은 대한민국 4점, 미국 4점, 포르투갈 3점, 폴란드 0점이 되었다. 16강 진출의 가능성이 급격하게 높아진 것이다!
마지막 경기는 대한민국 대 포르투갈, 미국 대 폴란드였는데, 가장 확실하게 16강에 진출하는 방법은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을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은 '루이스 피구'와 '리발두' 등, 세계적인 스타 선수를 보유한 슈퍼 초초초 강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르투갈전만큼 중요한 경기가 미국 대 폴란드 전이었다. 만약 폴란드가 미국을 큰 점수차로 이겨주기만 한다면, 그리고 대한민국이 포르투갈로부터의 실점만 최소화한다면 16강 진출의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웬걸!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은 한골도 먹지 않았다. 그러던 후반전 약 24분경, 이영표 선수의 센터링을 박지성 선수가 가슴으로 받는다. 수비수가 달려들자 공이 땅에 닿기 전에 오른발로 공을 다시 띄운다. 그런 다음 왼발로 슈웃!!!!! ... 예술적인 골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오른팔로 크게 원을 그리며 기뻐했다. 그런 다음 누군가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듯 여러 번 손을 흔들었다. 그의 품으로 박지성 선수가 달려가 안긴다. 다른 선수들도 그 뒤를 잇는다. 그들 모두의 눈에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지켜보며 응원하던 이들도 그랬다.
붉은 악마의 함성
대한민국은 미국 대 폴란드 경기와 상관없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역사상 첫 16강이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얼마 뒤 선수들을 불러놓고 강도 높은 욕을 했다고 한다. '16강 진출로 해이해지다니 너희에게 실망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선수들 분위기는 다시 단단해졌다. 이천수 선수는 "그때 감독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다음 경기인 이탈리아 전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일화는 당시 16강 진출이 갖는 의미를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아마 선수들이 해이해졌던 이유에는 '16강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실로 대단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한민국은 그 무서운 기세를 몰아서 4강까지 진출했다. 모든 경기마다 세상은 붉은 악마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시청 앞에만 80만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는데, 이 모습은 뭐랄까, 거대한 통에 성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인 어떤 것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거리 곳곳에는 페스티벌 수준의 거리응원과 행진이 이어졌고, 멈춰서 움직이지 못하는 차들조차 경적으로 화답했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부둥켜안고 기뻐했던, 인류애 실현의 장이기도 했다.
침상 끝 무릎들이 사라진 순간
결론적으로 나는 그 열기를 겪지 못했다. 2002년에 나에게도 꽤 큰 '처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경기의 전날인 2002년 6월 13일, 나는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포르투갈 전이 열린 14일 아침, "완보!"라는 의미를 알 수 없던 말을 외치며 첫 아침식사를 먹기 위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곳에서 같이 열 맞춰 걷던 이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막막함과 공포가 뒤섞인.
신병교육대는 외부와 분리된 섬 같았다. 6주의 훈련기간 동안 사회의 어떤 일도 접할 수 없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있는 6월 18일이 되자 훈련병들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 입대 날짜를 받을 때만 해도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군대에 오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밖에 있었다면 오늘 경기를 보며 맘껏 기뻐했을 텐데, 경기만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라고 헛된 기대를 했다.
“지금부터 각 내무실의 티브이를 켜고 축구 경기를 시청합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축구 시청을 위해 오후 훈련을 중단한 것이다! 그만큼 이 경기는 범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훈련을 받지 않는 사실에 원초적으로 기뻐했고, 이내 그 경기를 볼 수 있다는 흥분감으로 온몸의 신경들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소란 피우지 않습니다. 눈으로만 봅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누군가 기민하게 티브이를 켰다. 평소 그것은 마치 한 번도 작동된 적이 없는 것처럼 차갑게 식어있었는데, 전원 버튼을 누르자 긴 잠에서 깨어난 듯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눈을 떴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훈련병들은 침상 끝에 무릎 끝을 맞춰 앉은 채 티브이 속 세상을 바라보았다. 작은 화면 속에서 선수들이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티브이는 간만에 제대로 전기를 머금어 보는 게 꽤 기쁜 듯, 그들의 모습을 열심히 보여주었다.
경기 초 이탈리아의 골이 터졌다. 이곳저곳에서 조용히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경기는 이탈리아에 우세하게 흘러갔다.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당시 골키퍼였던 이운재 선수가 수차례 슈퍼세이브를 만들며 버텼다. '우리 골문은 촘촘하다. 그러니 한골만 넣어보자. 제발 한골만!‘ 하나 된 생각으로 화면을 노려봤지만 골은 터지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패배의 기운이 드리우던, 후반전 43분경, 설기현 선수의 발을 떠난 공이 이탈리아의 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하늘을 바라보며 뛰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거봐!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니까!"
동점골이 들어가던 순간, 침상 끝에 맞춰져 있던 무릎들은 일제히 사라졌다. 그전까지 내무실 이곳저곳에서 외마디 비명 같은 게 나오긴 했지만, 조교들의 '입 다물고, 눈으로만 봅니다.‘ 라든가, '누가 소리 내라고 그랬으어!' 같은 외침들이 복도 이곳저곳을 부딪치며 그것들을 잠재웠다. 하지만 후반전의 동점골은 모든 긴장감을 박살 냈다. 훈련병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열망을 드러냈다. 담장 밖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던 구호가 신병 교육대에도 찾아온 것이다. 다섯 번의 박수와 대한민국이라는 외침. 조교들의 제지는 없었다. 아마 그들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그 후반전에 승패를 가르는 골든골이 터진다. 골을 넣은 선수는 끼고 있던 반지에 입을 맞추며 뛰어갔다. 안정환의 이 세리머니는 '반지 키스'라는 이름으로 이후에도 긴 시간 동안 회자되었다. 그의 골과 함께 티브이를 보던 이들은 광기에 사로잡혔다. 저마다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물건을 집어 들고 박자를 맞춰 두들겼다. 나는 숟가락과 식판을 택했는데 쨍하고 날카로운 게 미쳐가기에 적합한 소리였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았다. 아마 사회였다면 이 벅찬 마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변과 거리와 세상과 교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선 그럴 수 없다. 그저 되도록 긴 시간 더 기뻐하고자 난리를 떨었던 것 같다. 결국 이 미쳐가던 집단은 복도로 모두 불려 나가 얼차려를 받았다. 이런 식이면 다음 경기를 보여줄 수 없다는 무서운 말도 들었다. 강도 높은 동작들이 이어지자 한두 명씩 복창 구호에 곡소리를 섞기 시작했다. 다시 내무실로 돌아와 자리를 정리할 때는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고요했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모두 속으로는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진짜 대박이다, 대박! 다음 경기 꼭 보고 싶어!
이것은 신병교육대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일 뿐이다. 그런데 그 열기를 대한민국 전체로 확대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만큼 2002년 월드컵의 여파는 대단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마치 그 지면을 빨랫줄에 걸어두고 팡팡 털어낸 것처럼 출렁였다. 거리 응원과 열기, 국가적인 단합의 분위기는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이는 운동선수의 예능 프로그램 진출 계기도 만들었다. 월드컵 기간 동안 대중의 관심이 스포츠를 넘어 사회 전반의 문화적 현상으로 확장되었고, 방송사들은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그들 개인의 캐릭터와 매력을 보일 수 있는 콘텐츠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즉 2002년은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경졔를 허문 해이기도 하다.
여전히 월드컵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평소 축구팬이 아니어도 월드컵이 되면 열광하곤 한다. 예상컨대 이토록 월드컵이 중요한 행사가 된 이유는 2002년의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 느꼈던 그 전율을 다시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만큼 모든 순간이 최고의 경험이자 영광이었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콘텐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