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May 06. 2024

1세대 아이돌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II


시작의 의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진다. 그래서 거대해진 무언가의 시작을 되돌아보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인 것 같다.


예컨대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다. 태어난 아기를 보게 되는 일도 가슴 벅차지만, 시간이 훌쩍 지나 그 아이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모든 게 시작되었던 신생아 시절을 떠올리며 새로운 감정과 의미가 더하게 된다.


그렇다면 대중음악에서는 어떤 시작들이 있었을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90년대를 기준으로 봤을 때의 가장 큰 시작은 '아이돌'일 것이다.


아이돌의 등장 전까지는 가수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주체적인 활동을 했다. 그때에도 소속사나 매니저 등의 개념은 있었지만 캐릭터나 음악의 방향성 같은 것들은 가수들의 몫이자 권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예기획사에서 가수의 방향성과 캐릭터를 먼저 설정했다. 아직 가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이는 보통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에 맞는 인물을 소속된 가수 중 선발하거나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모집했다. 계획했던 인원이 모이면 이들은 그룹의 역할에 맞게 춤과 노래를 훈련받는다. 개중엔 가수가 꿈이 아니었던 이도 있다.


그렇게 최초의 아이돌이 탄생했다.



그들은 노래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춤, 패션, 비주얼 등 시각적으로 탁월했다. 또한 그룹의 캐릭터가 분명하고 각 멤버의 개성과 매력도 있었다. 소속사의 전략에 따라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문화를 창출했으며 이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이돌은 가수의 역할을 전반적인 엔터테이너까지 확장하였다. 예능 프로에 얼굴을 내밀고 노래 외의 모습들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팬미팅 역시 체계적인 쇼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 같은 방식의 팬들과의 유대감을 강화하면서 최초의 팬덤 문화를 형성했다.


아이돌은 이후로도 시장의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며 성공적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90년대 당시의 아이돌은 이런 시장의 기틀을 마련한 '1세대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다.



1세대 아이돌


대표적인 1세대 아이돌을 뽑으라고 한다면 어렵지 않게 'H.O.T., S.E.S., 핑클, 젝스키스' 이렇게 네 개의 그룹을 고를 수 있겠다. 잠시 이들에 대한 TMI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짧지만 길다.


텔레비전에서 가장 먼저 보인 그룹은 H.O.T.였다. 1996년에 데뷔한 최초의 아이돌 보이그룹이다. H.O.T.는 High-five Of Teenagers의 약자로 '10대들의 승리'를 의미한다. 당시 이 의미를 모르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들을 '핫'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은 용서받을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순간 바로 신세대 타이틀을 반납하고 쉰세대가 된다.


H.O.T.는 <캔디>, <빛>, <행복> 등 많은 히트곡을 냈지만 인기, 유행 그리고 곡의 생명력 면에서 <캔디>가 최고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단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후렴구는 지금 10대가 들어도 "어? 이 노래 알아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곡은 그들의 데뷔곡인 <전사의 후예>다. 곡의 전반적인 긴장감과 파격적인 가사가 나의 중2병에 불을 지펴 주었고, 전주에서 빌드업되는 강렬한 비트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H.O.T.


다음 해인 1997년, 젝스키스라는 6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다. 핫에 비해, 아니 H.O.T.에 비해 좀 더 터프하고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젝스키스보다는 젝키로 더 많이 불렸는데, 이들은 또다른 팬덤을 형성하며 1세대 남자 아이돌 시장을 양분했다.


젝키의 노래 중 가장 오래 사랑받은 건 <커플>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곡들에 비해 부드럽고 젝키의 캐릭터와도 상반된 곡인데 아이러니. 이후로 <커플>의 리메이크 시도들이 있었는데 원곡의 벽을 넘진 못했다. 변성기가 끝난 보이스들을 뚫고 나오던 미성의 후렴구가 참 훌륭했기 때문이다.


젝스키스

1997년은 최초의 아이돌 걸그룹이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S.E.S.인데,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처음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사람이 맞나?"라고 생각했다. 뮤직비디오의 조명이라든가 카메라 기술을 잘 몰랐기에 새하얀 얼굴과 반짝이는 눈이 마치 천사처럼 보여서다. 심지어 (실제로 날개 비슷한 것을 달고서는) 드림은 컴트루한다며, 나를 믿어주길 바란다면서 천사다운 노랫말을 전했다.


S.E.S.


사실 1세대의 주역들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한 밤중에 기차 타고 가는 ‘신화’, 짜장면 불호인 어머니를 모시는 ‘god’, 우릴 향해 하늘을 열어 준 ‘듀스‘, 이제는 정말 구속받기 싫은 ‘언타이틀’, 할 수 있다고 소리치던 'N.R.G', '태사자' 인 더 하우스, 다시 만나달라던 ‘업타운’, 젓가락질의 혁명을 일으킨 'DJ DOC', 훗날 원피스를 만나게 되는 '코요테', 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던 '쿨', 간미연의 베이비복스, 김종국의 터보, 구준엽의 클론, UP(업 아니죠 유피죠) 등 말하자면 끝이 안 날 정도로 인기 그룹이 많았다. 하지만 핑클을 마지막으로 이 TMI를 끝내려고 한다. (사례를 드는 것이니 혹 다른 그룹의 팬이었더라도 서운해하지 않기...!)


1998년, 그러니까 S.E.S가 데뷔한 다음 해에 그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4인조 아이돌 걸그룹이 등장했다. S.E.S.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사의 느낌이라면 이들은 마치 언젠가 (그러니까 다음 다음 다음 세상쯤엔) 내 여자친구가 될 것 같은 느낌으로 이것 봐 나를 한번 쳐다보라고 했다.


핑클은 앨범이나 곡의 분위기에 따라 청순함, 귀여움, 성숙함, 섹시함 등 매번 다른 컨셉을 시도했고, 예능에서 크게 활약한 최초의 걸그룹이기도 하다. 가장 인기 있었던 곡은 <영원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젠 내 사랑이 되어달라며, 약속해 달라고 할 때는 정말이지 영원한 사랑을 기약하고 싶었, 아니, 팬들도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 했다.


핑클


당대를 휩쓸었던 이들은 모두 80년생이었다. (70후반~80초반) 다른 80년생과 동일하게 세월의 불가항력을 겪었고,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성인이자 중년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를테면 H.O.T.의 리더였던 자는 예능인으로서 종횡무진 모습을 드러낸다. 젝키의 리더는 부지런히 용볼을 모으러 다녔다. S.E.S.의 리더는 뮤지컬 배우가 되었고, 핑클의 리더는 민박집 사장님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등장은 한국에서 아이돌 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