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살 시선 III
10년 넘게 같은 직무로 일했다. 길었다면 길었고 ‘그래서 얼마나 자랐나' 따져보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은 느낌의 시간. 이 시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시니어의 역할을 요구한다.
'시니어(senior)'는 보통 은퇴 후의 노년층이나 손윗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쓰이지만, IT업계에서는 동일 직무 경력이 대략 7년을 넘긴 사람을 의미하며, 1~3년차인 주니어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니어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더 높은 직위, 더 중요한 결정과 책임, 업무 리소스 관리, 주니어 케어 등인데, 이 모든 것에는 리더십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나는 여러 사람을 살피고 리드하기보다는 한 개인으로서 효과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익숙하다. 까놓고 말하면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나서는 것보다는 보조하는 역할을 자처하곤 했다. 굳이 리더 근처의 뭔가를 해야 할 때는 반장보다 부반장, 분대장보다 부분대장, 대장보다 참모를 택했고, 잘 맞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리더십을 논한다는 것은 ‘글로 배운 연애’처럼 엉뚱 엉성하며 우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키워드를 한 번쯤 다뤄보고 싶었다. 좋은 리더십을 정의하긴 어렵겠지만, 지금 적고 있는 '40대가 조심해야 하는 행동'을 리더십의 관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80년대생이 주를 이루는 중간급 리더에게서.
두 명의 리더
그간 직간접적으로 많은 리더들을 지나왔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이가 둘 있다. 각각 C와 M으로 칭하겠다.
먼저 C.
C는 나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실력이 그가 신뢰할 만큼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다. 그는 내가 산출물을 보고할 때 "훌륭하다, 특히 이 부분이 그렇다"라는 식으로 먼저 반응했고, 이어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얘기했다. 나는 그가 뱉는 '훌륭하다'가 최대한 진심에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의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결국 실제로도 좋은 결과를 냈고, 그는 결과를 보며 말했다. "역시, 훌륭해요."
C가 모든 사람에게 기분 좋은 말만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문제 상황을 두고 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한 번은 아이데이션 회의 중에 한 팀원이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제안에 대해서도 딱히 대안 없이 부정적인 반응만을 보였다. 그의 태도가 회의를 경직시킬 때쯤 C가 "잠시만 멈출게요."라는 말과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 잠시 후 돌아와 회의는 다시 진행되었고 별 다른 일은 없었다.
이후 알고 보니 그 팀원은 C로부터 "다음 회의부터는 휴대폰을 내려두고 내용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C는 잠시 회의를 멈춘 후 자신의 자리로 가서 당사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온 것이다. 누군가에겐 그의 방법이 다소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는 C의 리더십에 존중이 담겨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다음으로 M이다.
그에게 칭찬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이었다. 마치 칭찬을 하면 어설픈 사람이고, 문제만을 빠르고 날카롭게 집어내는 게 더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M이 리더인 조직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도 신뢰를 받고 있다거나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이것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열심히 공을 들인 산출물이라도 M의 앞에선 '화를 참을 수 없을 만큼' 부족한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M은 그곳이 어디든, 누가 있고 몇 명이 있든,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불을 뿜었다. 이 분노의 칼 끝은 특정 개인을 향할 때도 있었고 그곳의 여럿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실력이 아무리 좋은 실무자라도, 누군가에게 있어 훌륭한 리더일지라도 그의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이것을 피할 수 없었다. 소위 박살이 났다.
두 리더의 공통점과 차이점
두 리더는 나에게 극명하게 다른 경험을 주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한 두 번의 사건으로 나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지속적인 업무 과정에서 나타나는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봤다.
두 리더의 공통점은 그 '결과'다.
두 사람 모두 매우 높은 타율로 성공적인 결과를 견인한다. 무척 똑똑하며, 판단력과 일 머리가 인간 너머의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더 중요한 사업, 더 많은 직원들을 관리하게 되었고, 역할의 무게와 크기가 바뀌었음에도 그 결과는 늘 훌륭했다. 팀원들 역시 그와 일하면 성공적인 결과에 다가가게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업무 역량 면에서는 두 사람 모두 천운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맞다.
다만 그 '과정'에 차이가 있다.
C의 과정에는 존중과 신뢰가 있다. 그는 이것들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듯했고, 그래서 설령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하여도 그 과정에서 얻거나 잃은 게 있는지 따져보곤 했다. 만약 심하게 고통받았던 사람이 뒤늦게 발견되면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래서 C는 과정이 다소 아슬아슬하게 흘러갈 때도 인내하며 기다린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과 능력이 담당자들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대했던 산출물이 예상과 달라도 무작정 자신의 답을 고수하지 않았고, 설득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그것을 위한 시간을 들였다. 고집을 부리고 싶을 때는 "이 부분은 양보를 못 하겠어요"와 같은 반응으로 강도를 알렸던 것 같다. 설령 결과가 최고에 못 미치더라도 그 과정을 잘 챙기며 최선에 도달하려는 C의 태도를, 나는 자주 보았다.
그렇기에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스스로 위기를 포착하고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리더인 C의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가 아닌.
M과의 과정에서도 두 가지 단어를 고르라면 분노와 불안일 것이다. 그와 일한 직원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초반에는 리더가 그렇게까지 화를 낼 정도로 부족한 자신의 실력을 탓한다. 인생을 거는 각오로 그가 지적한 문제들을 철저히 보완한다. 하지만 내 노력의 크기와 그의 분노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걸 알려주 듯, 그 경험은 또 찾아오고야 만다.
그 과정은 긴 터널에 빗댈 수 있다. 저 멀리 빛이 있고 언젠가 도달한다는 걸 알지만 그 직전까지는 매 걸음마다 칠흑 같은 어둠과 불안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과정이 아무리 안 좋아도 그 결과가 좋으면 해소된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실무자가 보고한 내용이 좋은 결과를 담보하는 정답이 아닐 경우 가차 없이 중단시켰다. 대체로 이런 상황에 그는 화를 냈는데, 정답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크기는 커졌다. 정답지는 M 자신에게 있었다.
결국 팀원들에게 '위기'는 그의 분노이며, '좋은 결과'는 그가 분노하지 않는 것이 된다. 스스로 고민하기보다는 그의 정답지와 기분을 헤아리는 일에 몰두한다. "오늘은 기분 어때 보여?"와 같은 대화가 오간다.
과정은 중요하다
과정은 중요하다. 이 말은 지칫 현실 감각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그것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결과가 부실하면 민망한 자축 파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을 가진 리더는 이런 상황을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상부에선 사업의 성과만 따지고, 고객은 그저 더 나은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궁금해할 이는 없다.
하지만 결과가 수면에 잘 드러날 뿐, 과정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좋은 팀워크와 문화는 이 과정을 통해 생성 또는 유지된다. 결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가혹하기만 한 과정으로 도달한 목적지에서는 결과의 가치에만 집중하게 될 수 있다. 담당자들이 그 과정을 돌아보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도 결과와 마찬가지로 반복되고 있다.
특히 80년생 리더의 경우, 이 과정을 놓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AI시대에 접어들면서 하나의 의문이나 수요가 결과에 도달하는 시간은 압도적으로 짧아졌으며, 그 정확도는 특이점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다. 다만 AI가 어떻게 그 결과에 도달했는지는 그 AI를 만든 프로그래머도 알 수 없다. 과정이 사라지는 시대, 어쩌면 좋은 팀워크나 문화도 필요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80년생은 과정이 중요했던 아날로그적 심장을 가진 마지막 세대이자, 업계의 허리를 받치고 있다. 이들이 과정과 결과의 균형을 맞추어야 그 흐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M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의 폭력적인 언사를 겪은 이들은 유사한 수준의 부정적 감정을 겪었고, 빠르게 사라지는 의욕들을 다시 모셔오느라 애를 써야 했다.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면서 다시 힘을 낸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반복되자 일에 대한 동기를 잃는 팀원들이 늘어났다. 결과가 좋았음에도 말이다. 이들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없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체적이고,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하며, 성장을 꿈꾸는 사람들이 팀을 떠났다. M의 팀엔 정말 뛰어난 인재가 둘이나 있었는데, 회사 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오죽하면 '최고의 복지는 좋은 동료'라는 말이 있을 정도. 이런 관점에서, 당시 그 정도의 동료가 한 팀에 둘이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우연이자 행운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회사와 팀에 대한 오너쉽과 로열티도 매우 높았으며 성공적인 결과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결국 팀을 떠났다.
리더로서 좋은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C가 고수했던 존중과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M도 이 사실을 알 것이다. 극명한 비교를 위해 특정 모습만을 강조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M도 괜찮은 사람이다. 말이 잘 통하며, 즐거운 기분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사다. 그런데 왜 업무 상황만 되면 자신의 좋은 면을 떨구고 칼춤을 추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나는 조직에서 그 정도 무게의 왕관을 감당해 적이 없다. 감히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의 경험을 비춰보면 유추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분노는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는, 압도적으로 간편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할 때, 상대가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이것은 마치 간주점프를 하듯 빠르게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그렇기에 한 번 그 맛을 보고 나면 다른 방법들은 번거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더 길고 복잡하며 많은 피로와 시간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M도 처음으로 분노를 표출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효과를 경험했고, 이런 선택의 반복은 그것을 '반드시 피해야 할 방법'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어느덧 '필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구든 공평하게 대해."
이 얘기를 했던 상황은 나를 비롯하여 당시 팀원들이 그에게 대차게 까인 뒤였다. 다소 분노가 소강된 후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는 말했다. 너희들이 못해서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니라며, 나를 상대하는 누구나 겪는 일이니 자책하지 말라며. 그것은 M 나름의 위로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누구든 공평하게 패"로 들렸다. 그리고 문장 속에 끼여있는 '공평'이라는 단어가 무진장 어색해 보였다. 공평의 뜻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니까 의미로만 보면 맞다. 그런데 이런 맥락에 사용하는 게 맞는 건가? 좋지도 원치도 않는 폭력을, '고르게 겪는다'는 의미로 '공평'을 사용해도 되는 걸까.
내가 앞서 경험담으로 언급했던 '폭력의 간편함'은 나를 받아주는 부모님이나 나보다 약한 아이와의 관계에서 얻었다. 이는 폭력적인 방법이 힘의 차이가 클 때만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M이 말하는 공평은 권력을 가진 '갑'의 입장에서만 취할 수 있는 편리한 태도다. 한 걸음만 더 멀리서 봐도, 그 장면에 공평함이란 없다.
만약 폭력적인 방법이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었던 경험이 있다면, 이것은 귀인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이유는 리더의 분노 때문이 아니다. 그의 다른 좋은 면모와 높은 능력, 그리고 팀원들의 노력 덕이다. 분노는 그 결과와 별개로, 과정을 어질로 놓았을 뿐이다. 구성원의 내면을 시들게 만들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는 말했다. '힘이 더 강한 쪽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라고. 그것은 더 나은 결과가 아니라 더 큰 폭력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 속의 갑을 관계에서는 갑이 을을 배려하고, 읍이 갑을 인정해야만 그 관계가 깊어질 수 있다. 갑은 절대로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사과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을 입장에서는 갑의 폭력을 제지할 수 없으니 그것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된다. 갑의 사과를 믿을 수 없는 이유다. 갑이 두렵기에 사과를 받아들일 뿐, 관계는 이미 깨진 것이다.
좋은 리더의 덕목
잘 모르는 리더십에 대해 적다 보니 노벨 평화상까지 끌고 와서 거창한 가치들을 언급하게 되었지만, 사실 내가 고민하는 리더십은 그렇게 높은 차원의 것이 아니다. 2024년 현재, 80년생인 내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현실 속에서 좋은 리더의 덕목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가 리더를 선택할 수 있고 그 리더의 한 가지 덕목만을 고른다면, (능력이 좋으니 리더를 한다고 가정하고) 나는 '느긋함'을 택하고 싶다. 여기서의 느긋함이란 '마음에 흡족하여 여유가 있고 넉넉한' 상태를 의미한다. 리더는 상부나 외부에서 오는 미션과 압박을 받으며 이를 팀의 특성과 개개인의 역할에 맞게 조정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느긋함은 리더가 겪는 스트레스를 팀원들에게 그대로 전가하지 않도록 돕는 중요한 자질이 된다.
느긋한 리더는 팀원들의 의견을 경청할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이는 결과적으로 팀원들이 각자의 동기를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나 역시 이러한 리더가 되고 싶다.
그래서 될 수 있을까? 어렵다. 내 기질을 고려했을 때, 느긋한 리더는 다음 생에나 기회가 생길 것이다. 막상 리더 역할을 해 보면 존중과 신뢰, 이 매우 아름다운 두 개의 단어를 끌어안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어서다. 크고 작은 빌런들이 넘실 파도 위에서 춤을 추고, 이곳저곳에서 예상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는데, 큰 스트레스, 큰 피로도, 작은 의지, 작은 마음, 작은 월급, 작은 수면 등을 다스려야 한다. 존중은 개뿔, 신뢰는 개나 줘버려, 이래서 매가 약이라는 말이 있군, 과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쉽도록, 두 가지만 기억하려고 한다. 꼭 필요한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 한 가지씩.
먼저, 꼭 필요한 행동은 팀원의 산출물을 본 후 좋은 점을 먼저 얘기하는 것이다.
긍정심리학자 바바라 프레드릭슨에 따르면 '성공한 조직은 긍정적인 표현이 부정적인 반응보다 3배 정도 많다'한다. 여러 조직 문화를 겪어본 결과 ‘성공한 조직’의 기준을 모든 업무 환경에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엄격하고 냉랭한 태도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분명한 것 같다.
내 경험에도 그렇다. 직장 내 칭찬은 상대가 그 부분을 강화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심지어 부족하지만 성장 중인 면에 대해서도 '이런 부분이 저번에 비해 더 좋아져서 반갑다'와 같은 말을 하면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경우를 봤다. 칭찬은 지적보다 어렵다. 그래서 수시로 떠올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공개적으로 감정적인 면박을 주는 것이다.
지적을 할 때 감정을 실는 건 단기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좋지 않다. 불필요한 긴장감을 높여서 정작 중요한 내용은 놓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다시 묻고 의논하는 과정을 통해 리더워 팀원 간의 생각 차이를 좁힐 필요가 있다. 감정 섞인 지적은 그런 과정을 감소시킨다. 더불어 리더가 드러낸 감정의 크기에 따라 그로 인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자원도 쓰인다.
심지어 이런 일이 공개적으로 일어나면 그 효과는 같은 장면에 있는 인원수 이상으로 크게 나타난다. 일단 공개적으로 면박을 당한 이는 그 수렁에서 나오기 위해 더 큰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해당 개인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장면에 있던 사람들도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도 언젠간 저 사람 같은 일을 '공평하게' 당할 수 있다는 생각. 불안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그러니 혹여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내가 떠올릴 질문은 한 가지다.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가." 행동에 앞서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만약 행동하고 만다면, 이는 답변을 유보한 게 아니다. 이미 답한 것이다. 예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