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나 Mar 25. 2018

할아버지와 할머니

1-3일

작년 봄에는 할아버지가, 그리고 가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꽤 오랜 시간 치매를 앓으셨고 끝내는 자식들을 알아보지 못하셨는데 그 시간 동안 곁에서 할머니를 돌보던 건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뒤 부쩍 기운이 없어 보이셨던 할머니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따라가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아흔을 넘겨 백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던지라 아빠를 비롯한 가족들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엄마 말에 의하면 요즘 아빠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는 날이면 가끔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운다는 걸 보면 덤덤해 보인다 하여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닌 듯하다.


할머니의 치매 증상은 점점 사람들을 잊어가는 것이었다. 철없던 나는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같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가 남편인 할아버지와 함께 마지막까지 기억했던 건 자신의 아들, 딸도 아니고 손자인 우리 오빠였다. 나와 오빠는 맞벌이셨던 부모님의 사정으로 시골 할머니 댁에 위탁했던 적이 있는데 나는 워낙 어렸고 짧은 기간이라 전혀 기억이 없지만 오빠는 3년 정도 시골에서 자랐다고 한다. 할머니 장례식 때 함께 할머니 댁에서 지냈던 사촌 언니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오빠한테만 계란 프라이를 해주고 우리 더러는 망할 년의 사투리쯤 되는 마한년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 차별의 기억으로 커서는 할머니 댁에 찾이 뵙지 않게 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린 말괄량이 딸을 키우는 언니가 아주 가끔 너무 화날 때 할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딸보며 속으로 마한년이라고 부르게 된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 의식이 없어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아빠를 불렀던 모양이다. 아빠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할머니가 의식이 잠깐 돌아오셨는데 그때 '내가 너무 오래 살았제?'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후에 별 이상이 없어 더 두고 보기로 했는데 결국 그날 밤에 할머니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겨울이 가까운 가을의 밤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보다 이른 겨울에 가까운 봄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풍채가 있고 백세에 가까우셨는데도 굉장히 정정하셨다. 할아버지와 아빠와 오빠가 나란히 서 있으면 세 쌍둥이처럼 풍채가 닮았다. 막내아들인 아빠는 걸음걸이마저도 할아버지를 쏙 빼었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바쁜 자식들을 대신해 할머니를 돌보는 건 온전히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시골집에서 두 분이서 사실 때에도 할머니를 돌보는 건 할아버지였고 증세가 나빠져 요양병원으로 모셨을 때도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웬만한 건 다 간병인이 해주었는데도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 곁을 지키셨다.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가 없으면 식사도 거부하실 만큼 의지하셨다. 명절에 문병을 가면 할아버지가 본인의 병실에 계신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항상 할머니 병실에 함께 계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내시는 동안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먼저 병환으로 떠나보내셔야 했다. 자식을 셋이나 먼저 앞세웠지만 할머니는 치매로 기억이 없었기에 그 슬픔을 온전히 혼자서 감내해야 했을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만약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을 나와 가족 중 누군가와 살 거라고 기대하셨지만 허무하게도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먼저 눈을 감으셨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출근 준비를 하다 소식을 들은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 부산으로 내려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 해 설에 문병 갔을 때 뵌 것이 마지막이 됐다.


두 분은 한 수목장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남이 묻힌 작은 나무 아래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지금쯤 그 나무에도 새순이 돋아났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