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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년의 위로, 서던다운 언덕길에서

바람이 씻어내고, 바다가 품어 주는 곳

by 봄이

웨일스로 터전을 옮긴 뒤, 가슴이 답답하거나 모국이 그리운 날이면 자연스레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있다. 집에서 차로 20분 남짓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서든다운이다. 굽이진 해안길을 달려 도착하면, 익숙한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주차장을 지나 옛 군사 훈련장과 잡초 우거진 정원을 지나면, 곧장 절벽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이 열린다. 계절에 상관없이 이곳의 바람은 거칠지만, 이방인의 고단함을 씻어주고 동시에 내가 낯선 땅에 서 있음을 일깨운다.

산책로 초입은 낮은 언덕을 따라 이어진다. 발밑의 풀잎은 바람에 눕고, 들꽃들이 사이사이 얼굴을 내민다. 오래된 돌담과 나무 울타리는 세월 속에 묵묵히 서 있으며, 이 땅의 오랜 숨결을 전한다. 머리 위로 매가 원을 그리며 날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풀밭을 파도처럼 일렁이게 한다. 나는 그 물결 속에 묻혀, 비로소 이 땅의 호흡을 느낀다.

조금 더 걸으면 시야가 활짝 열리고, 끝없이 이어진 바다가 눈앞으로 펼쳐진다. 햇살에 따라 은빛과 청록빛을 달리하는 바다는 바람결마다 얼굴을 바꾸며, 내 흔들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온다. 멀리서 달려온 파도는 절벽을 두드리며 낮은 북소리 같은 굉음을 남기고, 갈매기 울음은 그 위에 겹겹이 얹힌다.

절벽 가장자리에 서면 층층이 쌓인 회색 절벽이 눈앞에 드러난다.

마치 오래된 고서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놓은 듯, 시간의 기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억 년 전, 따뜻한 바다 속에서 조개와 산호, 작은 생명체들이 남긴 흔적이 차곡차곡 퇴적되어 만들어진 바위다.

가까이 다가가 바위틈을 살피면 작은 조개 껍질이나 산호의 자국이 남아 있어, 이 땅이 한때 바다였음을 말없이 증언한다. 특히 이곳이 속한 South Wales의 글래머건 해안(Glamorgan Coast) 은 영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해안 단층·퇴적 지질 노두 중 하나로, 지질학의 교과서이자 답사와 연구의 무대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이 언덕길은 웨일스 해안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웨일스 코스트 패스(Wales Coast Path)의 일부다. 남쪽으로는 글래모건 해안을 따라 카디프와 브리스톨 해협까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펨브룩셔 해안과 웨일스 북부의 곶과 만을 지나 체스터 근처까지 연결된다. 걷는 사람 누구나 자기 발걸음으로 웨일스 전역을 여행할 수 있다. 나 또한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눈앞의 풍경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웨일스라는 나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묘한 감각을 얻는다.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내 삶이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믿음도 선명해진다.

언덕을 걷다 보면 무너진 성벽과 잡초로 덮인 정원이 나타난다. 한때 귀족의 대저택이었던 던래스 성(Dunraven Castle)은 지금은 폐허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19세기 화려했던 성은 결국 병원으로 쓰이다 철거되었고, 이제는 흔적만 남았다. 그러나 남겨진 잔해조차 부와 권력이 영원하지 않음을 일깨우며,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을 대비시킨다.


성 아래 작은 주차장과 돌담 사이 길을 지나면 Dunraven Bay로 이어진다. 썰물 때 드러나는 자갈밭과 모래사장은 아이들이 파도 속에서 뛰놀고, 연인들이 절벽 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불과 수십 년 전,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사 훈련장이었다. 거친 자갈밭은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발자국을 받아냈다. 전쟁의 기억과 지금의 평화가 같은 풍경 속에 겹쳐 있다.

언덕과 해변에는 3억 년의 바다가 만든 절벽, 수백 년의 성과 정원, 그리고 수십 년 전 전쟁의 흔적까지 겹겹이 스며 있다. 파도는 여전히 절벽을 두드리고, 바람은 쉼 없이 불어오며, 나는 그 모든 소리 속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을 함께 느낀다.

오늘 바람과 파도 속에서 내 마음도 천천히 흔들리며 제자리를 찾는다. 3억 년의 시간 속으로, 나의 하루와 발자국 또한 평화롭게 스며들며, 조용한 위로가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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