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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어필리, 돌과 물, 시간의 기울기

by 봄이

성의 무게가 풍경을 붙들어두는 마을, 케어필리(Caerphilly). 웨일스 수도 카디프에서 북동쪽으로 약 11km 정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이곳은, 여러 번 찾아온 마을이지만 올 때마다 또 다른 장면이 나를 맞아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첫 발을 내디디니, 마침 교회 종소리가 울린다. 공기 속에 번지는 그 맑은 울림은 오늘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듯하다.

담쟁이가 얹힌 오래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길가 펍들의 문틈 사이로 풍겨오는 맥주와 빵 냄새는 마을 전체를 하나의 서정시로 만든다. 낡은 목재 창틀과 빛바랜 간판은 오래된 친구가 인사하듯 반갑다.

마을 앞 언덕길을 오르면 마침내 케어필리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자를 둘러싼 깊은 물과 회색 성벽, 섬세하게 부서지는 햇빛이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가 함께 만들어낸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작은 석교와 나무다리는 성과 세상 사이의 경계이자 연결을 상징하는 듯하다.


13세기 후반, 이곳의 영주 ‘붉은 길버트 백작’으로 불리던 길버트 드 클레어는 웨일스의 저항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성을 지었다. 성에 접근하는 모든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남쪽에서 흘러드는 작은 개천을 막아 인공호수를 만들고, 두 개의 댐을 쌓아 물을 붙잡았다. 오늘날 잔잔한 수면 아래에는 당시의 치열한 전략과 기술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이 방어 구조 덕분에 침입자들은 성벽 밑으로 굴을 파거나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돌과 물, 사람의 의지가 어우러진 이 성은 권력과 기술이 결합된 상징이기도 하다.


⇲ 철옹성 같은 성채

하지만 성이 지어지는 동안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거셌다. 작은 불이 나기도 했고, 때로는 대규모 봉기가 성을 뒤흔들었다. 14세기에는 웨일스인 Llywelyn Bren의 봉기가 이곳을 뒤흔들었다. 성 밖에서는 억압과 세금에 맞선 분노가 터지고, 성 안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왕실군이 움직였다. 그 격랑의 흔적은 오늘도 성벽에 고요히 스며 있는 듯하다.


마을 한복판에는 영국의 유명한 마술사이자 코미디언의(Tommy Tooper)동상이 서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소소한 풍경과 사람들의 작은 습관에서 웃음을 발견했단다. 아침마다 시장은 지나며 듣는 상인들의 농담, 마을 광장에서 친구들과 주고받던 장난스러운 말투, 심지어 비 내리는 날씨조차 그의 코미디 소재가 되었다.

그의 마술 또한 일부러 실패하는 듯한 리듬으로 관객을 웃음 속에 빠뜨렸고, 그 유쾌한 기운은 지금도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듯하다. 주민들은 그의 동상 제막식에 영국의 국민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함께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사와 유머, 장중함과 따뜻함이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동상을 지나 오래된 펍으로 들어가면 낡은 목재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주인은 익숙한 얼굴처럼 미소를 짓는다. 창밖으로는 성이 보이고, 햇빛이 해자 위 물결에서 부서지며 펍 안으로 들어온다. 달큼한 음식 냄새, 낮은 웃음소리와 대화가 조용히 겹쳐 흐른다. 그 순간 나는 과거의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펍옆 작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성을 둘러싼 산책로에 들어서면 물새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막는다. 백조와 흑조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오리 떼가 잔잔한 물결처럼 뒤를 따른다. 작은 갈매기들은 잔디 위에 앉아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한 걸음 내딛으면 조용히 날아오른다.


잔디와 자갈길 위에서 새들과 발걸음을 맞추다 보면 자연과 내가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이 온다. 해자 위로 날개가 스치는 소리, 갈대 사이를 지나는 바람의 숨결이 한 장면 안에 어우러진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다시 성을 내려다보면 성과 마을, 해자 위 석양이 한 화면에 포개진다.

기울어진 탑과 고요한 일상이 만들어내는 그 부드러운 균형 속에서, 시간조차 잠시 쉬어가는 듯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을 지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장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떠났다 돌아올 뿐이다.

마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같은 빛으로 우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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