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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Nov 23. 2019

거뭇한 나날들

 꿈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녀가 나에게 주는  번째 선물.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거품이 쩍쩍 갈라지며 번식하는 소리. 접시에 묻어 있던 음식물이 씻겨 내려가는 소리. 그녀와 관계된 모든 것을 듣고 느낀다. 보는 것은   없다. 나는 깨어날  없는 . 접시가 부딪힐 때는 칼날이 맞닿는 소리가 난다. 설거지가 끝났다. 고여 있던 음식물은 미끈한 흔적을 남긴다. 거품은 죽었다. 나는 그대로 꿈결. 그녀가 배를 문지르며 꿈결, 했다. 차갑지도 않고 축축하지도 않다. 나는 그녀의 상상 속을 떠다닌다. 검고 아득하다. 가끔 희망이 들어차고 대체로 꿉꿉하다.  



 그녀는 병원이 싫다고 했다. 깨끗한 느낌을 주입하는 듯한 알코올 냄새가 역하다고. 나는 냄새를 맡으려 애썼다. 감각을 둥그렇게 뭉치면 뭉칠 수록 그만큼 커다란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묻는다. 괜찮아? 그녀는 배에 손을 얹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나를 단단하게 둘러싸고 있는 심장 소리를 파헤쳤다.  쯤이면 벽이 아닐까, 싶은 곳으로 헤엄쳐 간다. 최대한 밀착한다. 나는 꿈결이고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는  뭐가 괜찮다는 건지   없었다. 괜찮다는 것을 학습한다. 그녀는 괴로울 때마다 배를 쓰다듬으며 괜찮다는 말을 굴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남자의 손을 잡고 유대감을 교환한다. 괜찮다는 말이 백혈구처럼 그녀의 온몸을 굴러다닌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진료실에 들어갔다. 눈물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내보내려는  아니라 새어나가지 않도록, 둥둥거리는 심장 소리와 괜찮다는 말들 사이에서 울음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다.



 의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상 속을 떠돌아다녔다. 사실이 상상 속으로 침투한다. 꿈결인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경직된 채로 떠다닌다. 상상 임신,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새로운 시작, 다양한 시도, 걱정 마세요. 사실이 빽빽하게 들어차면 꽤나 부푼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남자가 잊으라고 말한다. 그녀가 꿈결의 시작을 떠올린다. 그것은 나에게도 상영된다. 하얀 빛이 번쩍이는 순간 나는 태어났다. 그녀의 첫인상은 검고 꿉꿉하다. 외적으로는 어떨지   없었지만, 내가 마주하는 그녀의 상상은 아주 거뭇하고 습했다. 불꽃놀이처럼 아주 높은 곳에서 터지던 기쁨. 숨이 가빴고  형체는 가물거렸다. 내가 그녀의 상상 속에 살면서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시각물. 그녀의 기쁨은 원색으로 터졌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한동안 색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상영되는 기억  그녀가 남자에게 말했다. 아마도 아이를 가진  같다고. 둘은 눈물을 흘렸지. 나는 아무런 감정도 떠올리지 못하고 가만히 그녀의 슬픔을 받아들인다. 무게가 떠나갔다. 그녀가 배에 올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다짐이었다.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주 상담을 받았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가만히 떠다니며 상담사의 말을 듣는다. 그녀의 마음이 단단해지는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꿈결. 사실이 하나둘씩 입주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구석으로 내몰린다. 조금씩 밀려나면서 받아들이는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괜찮다는 말을 굴린다.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사실이 되어 태어날 수가 없다는 . 나에게 축축한 빨래감처럼 널렸던 기대와 희망들을 하나둘씩 걷어낸다. 주변인의 관심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나는 혼자의 힘으로 죽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나를 만들어낸 것은 그녀이므로, 나를 죽이는  역시 그녀. 거뭇하고 꿉꿉한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조금씩 곪아가고 있었다. 사실들이 나를 소독하고 깔끔하게 내팽겨칠 것이라는  감지했다. 그녀가 배에 손을 올리고 고마웠다는 말을  , 확신했다.



 그녀는 온종일 괜찮다는 말을 굴리고 있었다. 괜찮다는 것을 학습한다. 내가 죽을 때도 나는 여전히 꿈결. 꿈결이었고 앞으로도 꿈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거품이 쩍쩍 갈라지며 사라지는 소리. 거품이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감싸는 소리. 가을 바람에 몸을 맡기는 듯한 콧노래. 밝고, 보송하고, 좋은 상태. 눈을 깜빡인다. 그녀의 심장 소리보다  박자 늦은 새로운 심장 소리가 들린다. 검게 찌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상상 속에 살면서 여러 감정을 학습했다. 이를 테면 우울, 슬픔, 불안과 같은 꿉꿉하고 곪는 것들. 기쁨은   목격했지만 그것은 나와 관계가 없는 . 우울과 슬픔과 불안을 복습한다.

 최대한 아래로 헤엄쳐 청각에 모든 힘을 실었다. 새로운 심장 소리를 바라보고 싶었다.  아이의 이름이 궁금했다. 바깥으로 가득 쌓인 눈을 밟을 때처럼 부슬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괜찮다는 말을 굴리지 않았다. 사실이 완벽히 침투했다. 희망. 희망이었다. 그녀가 희망아, 하고 부르는 순간 하얀 빛이 번쩍였다. 거뭇한 나날의 끝이었다. 나는 깨어나지 않는 . 그럼에도 여전히 꿈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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