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늘 드디어 사직서를 던졌다. 물론 TV에서 보듯이 상사 면전에 속 시원히 사직서를 집어던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파트장님과 면담을 통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나의 의지를 전달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다닌다는, 나에겐 생각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가슴속에서 수 없이 되뇌이던 그 말을 드디어 오늘 내뱉었다. 사실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 파트장님 커피 한잔 하시죠? “
이 한마디를 하기가 왜 그리 어려웠던지. 일주일 동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할 뿐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음을 먹었지만 실제로 그 말을 내뱉기까지는 퇴사를 결심하는 것과는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내뱉는 순간부터는 주워 담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기에.
그래도 결정은 내려졌고 어떻게 해서든 최후의 통첩을 전달해야 했다. 파티션 안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이야기하면 왠지 분위기가 이상해 질 것 같아 파트장님과 둘만 있는 타이밍을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그 기회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파트장님이 회의를 가서 자리를 비웠을 때 조심스레 카톡을 보냈다.
“ 파트장님,,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 할 수 있을까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 무서워.”
개인적으로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한 번도 별도의 면담을 요청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하신 듯했다. 아무래도 나의 분위기가 오늘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셨을 것이다. 파트장님께서 회의에서 돌아오시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각자 테이블에 비치된 맥심 커피믹스와 종이컵을 손에 쥐고 조용히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참고로 건물 옥상에 담배를 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흡연자들은 종종 건물 옥상을 올라가곤 한다. 가는 길에 파트장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왜? 무슨 일 있어? “
“ 저… 퇴사하려고요..”
“ ……왜? 요새 많이 힘드니?”
이 대화를 시작으로 나는 퇴사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왜 퇴사를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최근에 어떠한 생각과 고민을 갖고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간혹 퇴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 서로 간에 감정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유학을 간다거나 대학원을 간다고 핑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야 회사에서도 잡지 않을 테고 퇴사자 스스로도 가타부타 퇴사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파트장님한테 솔직한 나의 심정을 말씀드렸다. 퇴사하는 이유에 대해 속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이유가 있던지 조직책임자에게 있어서 퇴사를 하겠다는 팀원은 달갑지 않을 것이기에. 그래도 왠지 순간의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파트장님은 원래도 흡연을 즐겨하는 편이긴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는 내리 3개비를 연달아 피우며 생각에 잠기셨다. 나는 개인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파트장님을 꽤나 좋아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꼰대도 아니었고 오히려 팀원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편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항상 노력하셨다. 이슈가 생겼을 때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주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리더였다. 실제로 부담스러운 업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도 파트장님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더 죄송했다. 좋든 싫든 나의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터였으니 말이다. 파트장님은 휴가를 좀 길게 다녀오면서 쉬다오라고 몇 번 나를 설득을 해보셨지만 나름대로 오랜 시간 동안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었기에 단호하게 말씀을 드렸다. 그런 의지를 느끼셨는지 더 이상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그리 길지 않은 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 평상시처럼 자연스레 메일을 새로고침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이 쿵쾅거리고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동안 남몰래 가슴속에서 수 없이 외치고 상상했던 그 일을. 이제는 되돌리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잔잔했던 내 인생에 큰 돌멩이를 기어이 던졌고 그로 인해 생겨나게 될 앞으로의 모든 일들은 오늘의 선택에 따른 대가이자 책임들이다. 오롯이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책임지고 감당해 내야 한다. 참으로 용감하게도, 그 일을 오늘 내가 저질러 버린 것이다.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 던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전쟁터에서 버티다가 총 맞아 죽느니
지옥불에 뛰어들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