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력서를 적을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취미/특기란을 채우는 것이다. 도무지 생각이 안나 겨우겨우 짜내서 어렵게 적었던 취미와 특기는 언제나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취미는 음악 감상이요 특기는 축구였다. 이게 참 웃기다. 나는 축구선수도 아닌데 과연 축구를 특기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자고로 특기라는 사전적 정의는
특기[特技] :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기능
을 뜻하는데 내가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대학교를 들어가서부터 축구를 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고 가끔 공을 찰 때면 5분도 안돼서 헥헥거리던 나다. 양심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특기 란에 축구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되었다. 취미는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 국민의 3대 취미생활인 독서, 영화 관람, 음악 감상 중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게 있다면 음악 감상이다.
그래도 외출할 때 항상 이어폰이 없으면 하루가 꼬여버리는 사람 중에 한 명이며 히트곡이 아니라 숨겨진 명곡을 찾을 때면 남모를 희열을 느끼기도 했으니 취미에 음악 감상을 적는 것은 나름대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참 개성 없고 특색 없는 취미 임에는 반박할 수 없지만, 이런 것들만 보더라도 내가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구나라는 것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 취미를 정말 열정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을 볼 때면 부러웠다. 그들은 본인들이 언제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즐거운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특기를 적는 란에 무엇을 적어야 할까? 정말 내가 특기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특기라는 것이 굳이 남들보다 특별히 잘하는 기술이나 기능은 아니 라도 내가 좋아서 집중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없다. 없어.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나는 특기가 없다. 30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특기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지 못하겠다. 참 절망적이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인생을 지금껏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마치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싸인 구겨진 도화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색이 입혀지거나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그 무엇이라도 채워져 '나'라는 사람이 표현되어야 했을 그곳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백지상태로 구겨져 단지 좋은 포장지에 감쪽같이 포장만 되어있는 상태였다. 좋은 기업에 취직해서 겉으로는 아주 그럴듯하게 보이며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지만 결국 들어 있는 내용물은 구겨진 도화지처럼 나 자신이 쓸모가 없이 느껴졌다.
요즘은 ‘덕후’, ‘덕업 일치’와 같은 말들을 자주들을 수 있다. 예전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소수의 팬들에게 '덕후'라 부르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요즘은 전문가에 버금가는 지식, 흥미, 관심을 갖추고 있는 비전문가들을 뜻한다.
전문성을 갖춘 아마추어라고 봐야 하며 요즘은 이런 아마추어들이 조금 더 전문성을 다듬어 관심사를 업(業)으로 삼는 경우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말 그대로 특기가 직업이 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프리랜서들이 각광받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 말은 곧 더 이상 회사에서 나의 고용을 안전하게 보장해 주지 않으며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맞는 특기와 취미를 살려 전문성을 갖춘 개개인의 활동이 두드러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전부터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것은 극히 일부의 행운아들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그런 행운아가 내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당신의 특기는 무엇입니까?"
만약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아닐 이유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