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누나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자는 약속을 잡았다. 누나는 작년에 결혼을 했다. 다행히 성격과 취향이 잘 맞는 매형을 만나서 깨 볶는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사실 누나와 나의 관계가 정상적인 남매 사이인지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개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절대로 간섭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래 왔고 성인이 된 지금도 그 룰은 여전히 유효하다. 서로 그러기로 합의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해 왔다. 집을 제외한 밖에서 따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 적도 한 번도 없다. 누나를 보는 공간은 언제나 집 안이었고 그래서 누나와 영화를 보거나 친구처럼 지내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그렇게 누나와 저녁 약속을 잡고 나서 누나와 단 둘이 저녁을 먹는 것이 태어나 처음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참 어이가 없고 황당하기도 했다. 이산가족도 아닌데 30년 만에 함께하는 첫 저녁 식사라니..
누나와 어린 시절부터 거의 다툰 일도 없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때 누나에게 까불다가 목이 졸린(?) 것을 제외하면 그 이후로는 단언코 누나와 싸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어찌 보면 사이가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데면데면했던 것 같기도 하다.
누나와 나 모두 서로에게 참 무심했다.
누나와 저녁을 먹는 표면적인 이유는 곧 다가올 아버지의 환갑잔치에 대한 것이지만 사실 오늘 누나에게 ‘퇴사’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아직은 부모님께 이야기할 단계는 아니라 누나에게만 넌지시 알려주려고 했다. 고기를 먹으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퇴사 이야기를 언제 하는 게 좋을까 속으로 계속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퇴사’ 이야기가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이었다. 결혼, 집, 회사생활 등 누구나 겪는 지극히 사소하고 소소한 사람 사는 이야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나에게 ‘퇴사’에 대해 이야기하면 왜 퇴사를 하려고 하는지 물을 것이고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어서’였다. 내가 누나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어찌 보면 너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대답은 진실된 이유였지만 누나는 허황되고 철없다고 느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누나 앞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퇴사를 이야기하는 게 혹시나 지금의 평범하고 현실적인 누나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두려웠다. 한 번도 누나와 꿈이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결국 누나에게 그 날 퇴사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대신에 회사에서 아버지 회갑 때 경조사비가 지원되니 걱정하지 말라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허세를 부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