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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Oct 17. 2019

독박 육아는 학대다

단이 탄생 4~5주 차

장모님께서 싱가폴을 떠나시고 2주 넘게 야간 육아를 하고 있다. 육아 경험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의 사전 지식을 나누자면, 신생아는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모유/분유의 양이 제한적이고 야간에 수면을 돕는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2~3시간마다 밤낮 구분을 못하고 배가 고프다고 일어난다. 밤새 내내 울지 않고 보채는 아기도 많다는데, 그래도 ‘단’이는 3~4시간마다 일어나서 매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새벽 2시, 6시 이렇게 비교적 규칙적으로 두 번만 일어난다. 아마 신생아 야간 돌봄을 해보신 분이라면 한 달 갓 넘은 아기가 이렇게 잘 잔다는 사실에 감사한 일이라며 박수를 쳐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야간 돌봄을 직접 해보고 나니, 돌봄 노동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지치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30대 초반의 남성이다. 출산을 내 몸으로 하지 않았으니 신체가 약해져 있는 상태도 아니다. 그런데 야간에 한두 번 일어나고, 낮에도 아기랑 몇 시간 놀아주고 나면 진이 다 빠지고 하루가 끝나버린다. 매주 한 편씩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브런치 육아일기도 야간 돌봄반에 투입된 지 2주도 넘는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한 편의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잘 보여준다. 이보다 훨씬 자주 아기가 2시간마다 깼던 첫 한 달을 돌봐주신 장모님께 정말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미 앞의 여러 글에서 밝혔지만 집에 상주 도우미 한 분이 주간 육아의 일부분과 대부분의 가사를 도맡아서 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산후조리할 때 출산한 여성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잘 먹고, 무거운 걸 들지 말라고 한다는데, 출산 후에 몸이 안 좋아지는 건 명백하게 육아 때문이다. 왜냐면 최근 양 손목이 엄청나게 시큰거리고, 어깨와 등이 결리는 소위 말하는 출산 후유증을 내가 경험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여성의 신체가 출산을 준비하기 위해 더 유연하게, 다시 말해 약하게 변화를 경험하겠지만, 그 몸의 상태를 급격하게 나쁘게 만드는 건 돌봄 노동 그 자체라는 말이다.


“남들 다하는 걸 가지고 생색을”


경험해보니 돌봄 노동은 하루에 4시간 정도가 가장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즐겁게 육아를 할 수 있고, 최대 6시간 정도를 넘어서면 육체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 건강에도 해롭다. (이것도 건장한 성인 남자의 기준이니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다.) 피로할 때 문제는 아이의 울음이 짜증스럽게 들린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스스로 놀란 점은 자신의 아기는 정말 엄청나게 이쁘다는 것인데,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 울 때도 귀엽게 느껴진다. 그런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도가 쌓였을 때는 그 사랑스러운 아이의 울음에 짜증이 올라올 때가 있다. 아기가 의사표현으로 우는 것 말고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냐고 생각이 들어도 그렇다.


그런데 이걸 한국에서는 모성신화로 아름답게 포장해서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성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엄마’가 되는데, 그 성스러운 그녀들의 삶은 성스러움과 가장 거리가 먼 곳에 있는 듯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돌보면서, 집안일을 다 처리하는 독박 육아는 경이로움을 넘어 학대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엄마’라는 역할을 강요받지 않고 이런 모성 신화에 자유로운 상태로 평생을 자라왔고 지금 육아를 하고 있는 내가 보기에, 자신의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육아를 하며, 밥 먹을 시간도 제대로 못 갖는 그 기간을 ‘성스러운 의무’라고 포장하는 사회적 의식에 분노가 치민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들 그렇게 아기 낳아서 키웠다.” 하지만 그동안 그렇게 해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 게 되지 않는다. 수백 년 전 노예제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노예를 부렸던 것이 옳은 일이 아니듯, 가정 폭력이 일상사였을 가부장 사회에 가장이 저질렀던 폭력이 옳은 일이 아니듯, 흔한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모르는 사람한테 길가다 맞고 와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게 정상이 아니듯, “엄마가 돼서 그것도 못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아이는 사회가 키워야 한다


제사 때마다 부부간에 갈등이 심해져 모든 부부가 이혼해서 일하러 올 며느리가 없어지고 남자들만 남으니 제사가 없어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도 ‘중요한’ 제사는 일할 사람이 없으니 없어진다. 이것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어머니도 30년 넘게 막내며느리로 제사를 준비해왔는데, 최근에 더 이상 제사를 지내러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자마자 제사가 없어졌다. 사회의 악습은 손쉽게 희생을 강요할 희생양이 있을 때만 이어져온다.


육아는 과연 다를까? 많은 사람들이 육아를 “집에서 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소리하는 사람을 딱 일주일만 집에 가둬놓고 육아를 하라고 하면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을 텐데. 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의 범위에 자신이 벗어나 있을 때 아주 쉽게 침묵한다. 조금만 참으라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비겁한 말인지, 평생 비겁하게 희생의 범위에서 한 발씩 도망치며 살아온 사람들은 그 사실을 손쉽게 외면한다. 당연히 희생을 강요해도 되는 엄마가 있으니 육아가 가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사회적 세뇌는 전방위적으로 이뤄진다. “네 자식을 낳아 놓으면 똥냄새도 향기롭다”는 부모의 부모, “그래도 자기 아이는 다 키우게 된다는” 또래 아기 엄마, “다른 집 엄마들 다 하는 일인데 뭐 그렇게 엄살이냐”는 남편과 주위 사람들이 끊임없이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만든다.


역사(사회사) 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모성애는 근대적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모성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라니 말이 되냐고? 물론 동물로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마로서 수행해야 하는 수많은 역할이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부모의 부모 시대, 즉 조부모 시대만 생각해보더라도 엄마는 전적으로 자녀를 돌보는 존재가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는 부모를 포함하여 자식들도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근대화가 되면서 주거지와 업무 공간이 분리되면서 남자들이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복잡해지는 산업화 과정의 노동을 따라가기 위해 아동의 노동이 금지되고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을 하는 근대적 교육 시스템이 정작 되었다. 이 교육 시스템은 아동을 노동에서 해방시켰지만, 반면에 기본적으로 성인이 되기 전의 학생을 연약하고 완전하지 않은 존재로 보고 오랫동안 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불완전한 자녀를 돌보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더 자세한 내용을 찾아보고 싶은 분은 ‘modern motherhood’라는 키워드로 도서 및 논문 검색을 권합니다.)


상해에서 1년 간 살 때, 중국인 친구들과 명절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한국 제사 문화를 소개하면 깜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 이 문화가 중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아주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명절이란 가족들이 모여서 같이 음식을 해 먹는 문화이고 한국식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문화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1가구 1자녀 정책 덕분에, 명절에 남편 집으로 가면 딸 가진 부모는 자식을 언제 보냐며 한 해씩 번갈아가면서 부모님 댁에 가거나, 아예 따로 각자 부모님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중국의 전통을 전해받아 개악해서 악습을 전통이라며 수십 년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육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아이는 어떻게 키워져야 하는가? 나는 사회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대가족을 꾸리고 살았기 때문에, 집에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이 시대에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육아를 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아이를 가진 부모는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모, 특히 엄마는 출산 후 언제든지 회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여기저기 도움을 구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북유럽 국가에서 부모들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유롭게 계약을 시간 단위로 전환할 수 있는 이유이고, 싱가폴에서는 상주 도우미를 주변 국가들에서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부모로 살아가는 많은 친구들의 삶을 보면 너무나 처절해 보인다. 그들의 삶은 훨씬 더 나아야 하고, 그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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