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에 있어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칭할 수 있는 명확한 단어를 찾아보는 것은 그 감정을 이해하고 해소하는 것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분명 그것이 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불분명하거나 불확실할 때가 많습니다. 그 감정의 이해를 위해 프로이트의 방식으로 과거를 통해 감정의 원인을 추적해보는 것도 아들러의 방식처럼 원하는 목적을 위해 그 감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도 사람에 따라 본연의 감정을 이해하고 해소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전 아니었습니다. 전 화가 났습니다. 많은 양의 분노를 가지고 있었죠. 물론 타인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대한 분노였습니다. 흔히 자책이라고 하죠. 똑똑하지 않는 자신, 바보 같은 행동과 판단, 어리석고 우매하며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내 안의 모습을 발견할 때, 또한 잘 나가는 타인의 모습과 낮아진 스스로의 상황을 비교할 때면 쉽게 자책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염두에 두지 않은 체 끊임없이 분노의 감정을 마음으로 삭혔습니다. 어느덧 이것은 일상이 되었고 아주 작은 자극에도 쉽게 폭발할 것만 같은 무언의 덩어리를 마음에 안고 살아가는 기분이었죠.
혹자는 그리 말을 했습니다. ' 나이 들어감에 의해 발생하는 호르몬의 불균형 현상이다. ' 또 다른 혹자는 ' 세로토닌이 부족하는 것일 수도 여성과는 다른 남성형 갱년기 증상의 일환이거나, 불규칙한 생활습관, 불안감, 불면, 우울감, 잦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라고도 말씀해 주시더군요. 쉽게는 분노조절장애, 간헐적 폭발 장애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죠.
참 재밌는 사실은 머리는 분명 언급된 위의 사실들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불안, 불면, 우울 감정들도 느끼며 현상적으로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으나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마음이 와 닿는 것이 아니니 이해는 하지만 공감가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과 해결점을 바라는 자신에게 나의 현재의 상태만을 설명해주는 느낌이었죠. 그 현상을 머리로써 이해했을 때 약간의 해소감과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의 흐름이 망각을 불러왔던지 감정은 다시 기존의 형태로 되돌아 가더군요.
의구심이 생기더군요. 수많은 인터넷의 해소 방식을 따라 해 보기도 했습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마음 잡기, 산책을 하거나, 간헐적 명상을 접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의 효과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효과를 야기할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스스로가 느끼기에 이러한 방식들의 효과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마음의 큰 변화를 유도하지 못한 체 아주 미비한 효과만을 야기했다는 점입니다.
흔하게 case by case(케바케)라고 예기하죠. 난 내 case가 너무나 궁금하였습니다. 오기도 생겼습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묘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죠. 분명하게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명할 수 있는 분명한 단어가 존재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그것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거나 찾아내거나 알아낼 수 있다면 내 감정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욕망 때문인가! 열망 때문인가, 스트레스나 우울감 때문인가? 나는 왜 대체, 나는 왜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냐!' 허례허식에 쌓인 단어들을 조금씩 제거해 보기로 했습니다. 단순하고 무식해서 그럴 수도 있으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나 불안, 욕망이라는 단어들은 ' 바로 그것이다.'라는 느낌으로 마음에 비수처럼 꽂혀오지 않았기 때문이죠. 좀 더 쉬워야 한다. 조금 더 직접적이어야 한다. 조금 더 단순하고 명확해야만 지금의 난
'이것'때문에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수많은 감정과 단어의 변화, 제거, 인식을 거치고 나서야 마치 선명한 광고의 카피처럼 명확한 하나의 문장이 마음에 안착되었습니다.
'필사적',
'나는 필사적이었습니다.' 나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걱정의 감정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점에 맞추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그런 필사적인 감정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 맞닥드리게 되었을 때 나는 분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노를 통해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제할 수 있는 이성과 달리 마음과 감정을 극단의 형태로 치닫게 되는 것이었죠. 그것 덕분에 반복적인 생각과 행동을 일삼는 자신을 마음으로 질책하고 있었고 나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었죠.
물론 이것은 case by case의 내용일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제 케이스의 경우에는 감정이 조절되지 않거나 질책과 분노의 감정이 마음의 귀퉁이에서 꿈틀거리면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봅니다. '내가 지금 무엇에 대해 그리 필사적인 것인가!'를 말이죠. 사람은 누구나 감정과 느낌을 가집니다. 안타깝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때론 불분명하고 불명확한 형태로 이성과 마음을 주무르기도 하죠.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타인의 평가와 정제된 지식은 온전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써 마음의 만족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잠시간 스스로의 마음과 감정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의 인식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명확한 단어를 추적해보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때론 작은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