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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n 27. 2023

엄마와 타투

어쩌다 정신병원 (14)

고등학생 때부터 타투에 관심이 많았다.


성인이 되면 바로 타투를 하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첫 타투는 한참 뒤인 20대 후반에 했다.




늦어진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인 엄마는 나를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키우셨다.


대학교 갈 때까지 핸드폰을 금지하셨고 귀도 못 뚫게 하셨다. 대학 진학 후에도 나는 고등학생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 가는 대로 결정을 하려다가 번번이 엄마말만 들으면 손해보지 않는다는 설득에 넘어갔다.


교환학생도 내가 가고 싶은 곳 대신 엄마가 원하던 북경대로 갔고, 결국 적응을 못하고 중간에 돌아왔다.


언어폭력을 하는 상사 때문에 인턴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버티라고 했다. 그렇게 회사에서 당시 제일 오래 버틴 인턴이 되었고 그만큼 트라마도 오래갔다.


차라리 평생 ‘착한 ‘ 딸로 엄마 말만 들으면서 살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오랜 해외 생활로 엄마와 나의 가치관과 생각은 매우 상반되었고 싸움은 잦아졌다. 엄마는 자주 “이럴 줄 알았다면 유학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한탄과 하소연을 하셨다.




엄마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나도 유학을 후회한 적이 있다.


어렵게 간 유학 때문에 나는 평생 부모에게 부담을 준 딸이 되었고 실패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으로 이를 악물고 10대와 20대를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고등학교 때, 영어 교사인 엄마는 미국 선생님들께 자주 이메일을 썼다. 내 성적이 떨어질 때마다, 이해해 달라고, 죄송하다고 썼다.


그런 엄마가 이해가 안 갔다. 왜 내 성적 때문에 엄마가 매번 사과를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나중에는 아예 나보고 선생님들께 보내는 사과 이메일을 쓰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로 빙의해서 선생님들께 사과문을 돌렸다. 엄마는 영어로 척척 이메일을 쓰는 나를 자랑스러워 했다. 돌이켜보면 실소가 나온다.


성적이 90점 이하로 내려가면 바로 실망했다는 전화와 이메일이 왔다. 받지 않으면 17번 연속으로 전화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벨소리가 울리면 예민해지고, 전화통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


너무 누르면 터지는 법이다.


대학생 때, 방 안에 있던 담배를 보고 엄마는 소변검사 키트를 주문했다. 과하다고 느꼈다. 코를 뚫었을 때 엄마는 울었다.


가끔, 내 ‘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노 재팬’ 기간에 일본을 갔을 때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며 실망했다는 긴 메시지를 보내셨다. 잦은 제사 참여를 거부하자 울면서 불효녀 취급을 했다. 인스타그램 여러 계정을 만들어 계속 친구 신청을 해서 거절을 했더니 울면서 질타하고 섭섭해했다. 결국 프라이버시를 포기하고 친구 수락을 했다.  


엄마의 ‘사랑’이 너무 버거웠다.


이십 대를 거치면서 최대한 엄마와 정반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소 같다는 비아냥을 무시한 채 코를 계속 뚫고 다녔고, 머리를 기르면 좋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남동생보다 머리를 짧게 잘랐다. ‘교양’을 중요시하는 엄마 앞에서 보란 듯이 비속어를 뱉으며 다리를 오므리고 앉으라는 말에 일부로 쩍 벌리고 앉았다.


이년 전, 부산으로 세 달 동안 도망을 갔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자유를 느꼈다.


매일이 행복했던 부산생활. 집 뷰가 한몫했다.


먼 거리 덕분에 자연스럽게 엄마의 영향도 줄어들었다.


어느 날, 충동적으로 타투를 하기로 했다.


타투를 한다고 미리 경고(?)를 했더니 엄마는 죽어버린다고 하셨다.


찜찜함과 죄책감을 뒤로하고 등 뒤 첫 타투를 새겼다.


엄마는 죽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엄마가 왔다.


너무 힘들어서 일을 쉬거나 그만두고 싶다고 했더니 모진 말이 날아왔다. 차마 여기에 적을 수가 없다.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살다가 내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의사쌤은 엄마와 몇 년간 거리를 두고 완벽하게 독립을 하라고 하셨다. 솔직히 아직까지 그럴 자신은 없다.


하지만 퇴원 전에 다짐을 했다.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쉬운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 엄마의 테두리에서 안전한 선택을 강요받은 내게 오로지 나만의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부끄럽게도 아직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퇴원과 동시에 마음을 굳게 먹고 제일 먼저 실행한 일이 있다.


삼 년 동안 고민하던 타투를 팔에 새겼다.


두 번째 타투이다.


브라질 작가의 그림인데 한 남자가 의자를 천장에 매단 상태로 누워있는 그림이다.


목을 맬 때 쓰는 의자를 오히려 매달아 버리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죽인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오랫동안 이 그림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기 때문에 타투를 해도 절대 후회할 것 같지 않았다.



일단 브라질 작가에게 메시지를 해서 타투 허락을 받고 그림을 구매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찾은 한국 작가분께 도안을 나와 어울리게 살짝 변경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타투를 받으면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의사쌤 말대로 엄마를 향한 나의 감정은 거대한 덩어리이다.


애증과 사랑, 원망, 연민 그리고 분노가 제멋대로 섞여서 날이 갈수록 비대해졌다. 녹일 수도, 부실 수도 없다.


그 과정에서 엄마나 내가 파괴될 것 같기 때문이다.




팔 안에 새긴 인간은 의자 밑에서 새싹을 들고 있다.


타투를 받으러 가서 마지막까지 식물을 고민했다.


클로버는 현재와 대비되어 이질감이 들었고, 빨간색 꽃은 부담스럽게 밝아서 연두색의 새싹을 골랐다.


타투를 받으니 새싹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2023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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