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디킴 Sep 10. 2021

‘형이 왜 거기서 나와’

광고회사 출신 광고주 방지법을 청원합니다.

형님은 저와 합이 꽤 잘 맞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팀 아이디어를 자주 칭찬해 주고 조언엔 늘 진심이 묻어났죠. 팀원들도 형님을 참 좋아했어요.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인 당신을 회사에선 ‘박사님’으로 불렀답니다. 그런데 진짜 박사가 되셨더라고요. 틈틈이 출강 준비에 바쁘시더니 결국 회사를 떠난다기에 ‘교수님 되시겠다.’ 했어요. 당신을 보내는 임원들 모습이 딱 그랜저 광고 같았는데. ㅋㅋ      


비딩 페스티벌 펼쳐지던 지난겨울... 광고주 OT가 있던 날 기억하세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당신! 존경해 마지않는 형님이었어요. 송년회 때 뵀으니 거의 1년만... 광고주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전 ‘부장님!’하고 쩌렁쩌렁 외쳤어요.      


반가움도 잠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반지르르한 수트 위로 반짝이던 광고주 ID카드를 발견했을 때였어요. 끊어졌던 정신 줄이 이어지며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죠.       


신, 신현 ㅈㅜㄴ

과, 광고 ㅈㅜ     

“어, 너 일 잘하잖아.” 

“내가 부르자고 했어.” 

“우린 공정하니까 점수대로 할 거야. (웃음)”

“잘 되면 밥이나 제대로 사.”     


실무진 점수는 우리가 꼴찌였다구요? (배신자...) 하지만, 회사는 사장님 거예요. 형 도움 없이 순전히 사장님 힘으로 우린 000 브랜드의 1위 수성을 위해 한배를 타게 됐지요.      

그런데 형님, 형님은 악마예요. 형은 우리 견적 다 후려치고, 로데이터까지 요구하셨죠. 제작비는 뭔 제작비냐며 매체비로 먹고살라고 하셨고요. 구글은 또 어떻게 족쳐야 박사님 감성에 맞춰드릴 수 있을까요? 형의 끔찍한 마이크로 매니징에 우리 팀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CD인지 시다 인지 정신 착란과 탈모, 새치, 검버섯까지 얻었답니다. 회사에서도 형님 포기했어요. 당신이 CD잖아요. 본부장이잖아요. 감독이잖아요. 천재잖아요.     


내부 의견은 중요치 않았어요. 우린 오직 당신의 이론과 논리와 천재적 이성의 시험대에서 춤추는 광대인걸요. 그래도 가끔은 당신의 애자일 덕에 해보고 싶은 콘텐츠를 맘껏 만든 적도 있어요. 꽤 보수적인 우리 회사에선 시작하자마자 킬 당했을 거예요. 그거 하나 고마워요. 형님.      


얼마 전 형님을 만났어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셨더라고요? 광고주 가면을 벗고 존경받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온 당신... 소오오오오름.


“내가 언제 그랬냐?” “야, 결과 좋았잖아.” “내가 칭찬받냐? 다 너희 좋은 거지”

환장하겠습니다. ㅜㅡ; 이 공감 거지 양반아. 아이고...       

옥상옥이라 해도 형님은 나름대로 능력 있었어요. 

날카로웠고요. 확실히 아는 X이 더 무서웠어요. 


요즘 광고주들이 광고회사 출신 영입이 유행이래요.

“그래도 나 정도면 양호한 거야.” 누구는 이렇다더라. 누구는 저렇다더라. 

마스크 속에서 침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당신의 혀를 뽑아먹고 싶었지만, 옛정을 생각할게요.       

대신 오늘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가볼까 해요.      


[광고회사 출신 광고주 방지법을 청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파리와 지느러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