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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광 May 18. 2017

서울에서 시카고 시간으로 지낸다는 것

프롤로그: 편의점 야간알바생의 하루

어서 오세요.




저는 편의점 야간돌이입니다.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10시간 동안, 밤 11시에 출근해서 아침 9시에 퇴근하는, 흔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이에요. 몸은 서울(GMT+9)에 있지만, 시간은 미국 시카고(GMT-6)에서 끌어다 쓰면서 살고 있지요. 어쩌면 서울도 시카고도 아닌, 그 14시간의 간극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활도 어느덧 4개월째네요.


혹시 ‘왜 굳이’라는 한마디를 포함한 물음을 떠올리시는지요? 별일 아니랍니다. 알바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야 모두 비슷하지만, 알바라도 해야 하는 이들의 까닭은 저마다 다르기에, 굳이 편의점 야간알바를 시작하게 된 사연을 저는 덧붙이지 않을게요.


대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편의점과 야간돌이에 관한 자잘한 이야기들을 쓰겠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매거진 <어느날 POS기가 말했다>는 심심하고 야심한 편의점에서 아무 말이나 써내려간 철야(徹夜)의 기록입니다.




편의점 야간알바생의 하루는 단조롭습니다. ‘밤’이라는 한 글자로 요약될 수 있지요. 밤에서 밤으로, 다시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생활의 연속입니다. 집과 편의점 간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생활은 더 단조로울 것이라고 말한다면 동어반복이겠지요.


제가 일하는 편의점은 집에서 가깝습니다. 자전거 타고 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랍니다. 그래선지 출근 마감시간이 임박해서야 저는 겨우 잠에서 깨어나요. 저의 하루는 10시~10시40분 사이에 시작해요. 일찍 일어나면 오후 10시, 늦게 일어나면 10시40분이에요. 요즘엔 늦게 일어나는 게 일상다반사예요. 하긴 일찍 일어나건 늦게 일어나건 밖은 어둑한 밤일 텐데, 눈을 언제 뜨건 그게 뭐 대수인가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매일매일 데드라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지내는 기분이 든다는 사실까지는 숨기지 못하겠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제 몸은 매크로라도 설정된 것처럼 자동으로 움직여요. 눈 뜨고, 시간을 확인하고, 앉은 채 눈을 감고, 다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또 시간을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2리터짜리 생수병을 꺼내서 물을 몇 모금 벌컥벌컥 마시고, 보일러 ‘온수’ 버튼을 누르고, 대충 씻고, 옷 입고 현관 밖으로 나서는 데까지 10분쯤 걸리려나요. 이래도 지각은 안 하더라고요. 다행히도 꼬박꼬박 제시간에 출근해요. 아마도 제가 늦으면, 전(前)근무자는 꼼짝없이 편의점에 갇힌 채,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저를 원망하겠죠.


편의점 야간업무라고 해봐야 뭐, 특별한 일은 없어요.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알바생인 저는 인사하고 계산할 따름이죠. “어서 오세요” “0000원입니다” “또 오세요” 참 쉽죠? 10시간 동안 이것만 하면 돼요. 점장님이 성격 좋은 덕분에 손님이 없는 동안에는 의자에 앉아 있어도 괜찮답니다. 카운터에 의자조차 없다는 편의점들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요.


아아, 물건을 정리하고 상품을 진열하는 일도 빠뜨릴 수 없겠네요. 야간은 편의점이 재충전하는 시간이에요. 서너 차례 나뉘어서 물건들이 들어오죠. 제가 일하는 점포에서는 밤 11시30분쯤 우유·냉장식품이 들어오고, 12시쯤엔 ‘FF(Fresh Food, 신선식품)’라고 해서 삼각김밥·샌드위치·도시락·빵이 들어오고, 오전 1시 20분쯤에는 컵라면·과자·술·담배 등등이 들어온답니다. 편의점에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저는 그 상품들을 정리하고 진열하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유통기한 지난 식품들을 폐기처분하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고, 바닥 청소까지 다 마치고 나면 시간은 오전 4시~5시쯤 돼 있어요. 할 일이 없어요.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에요. 책을 읽든 공부를 하든 소일거리를 찾아야지요. POS기 앞에서 몇 시간 부스럭거리다보면 그래도 퇴근할 시간은 다가와요.


오전 8시가 되면, POS기에 현금이 제대로 들어 있는지 ‘시재점검’이라는 것을 하고, 진열대에 비어 있는 상품들을 채워 넣는 등 다음 근무자에게 인수인계할 준비를 하죠.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게 일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다음 근무자였다가, 다음 근무자였다가, 다음 근무자일 것이었다가...


오전 9시, 출근할 사람들은 다 출근했을 시간이지요. 교복 입은 학생들은 교실에서 1교시 수업을 듣기 시작했겠네요. 제가 형광등 100개를 켠 듯한 편의점에 앉아 있는 동안, 언제 이렇게 날이 밝았는지 거리에 어스름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오늘은 몇 사람이나 회사에, 학교에 지각했을까요?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며 저는 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갑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5분 빠른 시계를 보면 시침과 분침은 오전 9시10분을 가리킵니다. 밥 먹고, 이것저것 책상 앞에서 부스럭거리다가 오후 4시쯤 되면 슬슬 속눈썹이 무겁습니다. 자야할 시간이 된 것이지요. 암막커튼으로도 다 가리지 못하는 햇빛을 제 눈꺼풀은 과연 막아줄 수 있을까요.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생활-. 겨우 철야(徹夜)하고 나면 백야(白夜)가 찾아오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벌써 해가 중천이네요. 또 하루가 저뭅니다. 자고 일어나면 밖은 어둑한 밤이겠지요. 아니, 제게는 아침이던가요.


여기는 서울, 시간은 오후 4시30분. 같은 시각, 미국 시카고는 오전 2시30분을 통과합니다. 여기는 시카고, 시간은 오전 2시30분. 같은 시각, 서울은 오후 4시30분을 지납니다.


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오늘은 이만, 여기서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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