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렘 Mar 26. 2020

아빠와 세발오토바이

어설픈 딸노릇이 미안해서

서울에서도 종종 세발 오토바이를 볼 수 있다.

특히 내가 일하는 서빙고라는 동네에서는 더 종종 볼 수 있다.

오늘만해도 퇴근길에 교차로에 세워진 세발 오토바이를

한 대 보고는 반자동으로 아빠 생각을 했다.


세발 오토바이란 게, 워딩 그대로 읽으면

약간 세발 자전거가 연상되면서

앙증맞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사실은 삼륜차라고 해서

오토바이보다는 많은 양의 짐을 적재할 수 있고

바퀴가 하나 더 있어 좀 더 튼튼한 오토바이인 셈이다.


아빠의 삶은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부지런했고 성실했다.

필연적으로 밤낮없이 일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직업은 포도농사에서부터 정육점일 등이 전부지만 늦둥이인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훨씬 그의 노동의 강도가 세고 길었을 거라 짐작한다.

산골에서 돼지를 키운다거나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수백킬로미터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건너건너 들었었다.


아빠는 젊은날 밤낮없이 일하면서 얻은 통증으로

허리 다리 수술도 몇차례 했다.

그 후유증으로 나이가 든 후부터는 한 쪽 다리가 불편해서

절뚝거리며 걷게 되었는데, 점점 증상이 심해졌다.

몸이 쇠약해지면서 약한 다리의 힘도 더 약해갔다.


아빠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그래서 내 유년시절의 사진은 늘 아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있거나

오토바이 옆에 서서  짐부리며 서있는 것들이 많다. 오토바이가 아빠의 전용 자가용이었니 나를 태우고 갈 수 있는 좋은 곳은 다 다녔던 것 같다. 론 엄마의 조력아래.


어쨋든 아빠의 다리힘이 약해지면서

더 이상 두발 오토바이의 무게를 두 다리로 지탱하기가 어려워졌다. 나에게 상세히 말은 안 했지만 몇 차례나 오토바이를 타고 수풀에, 도로에 넘어진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꽤 많이. 러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자주.


어느날인가 아빠는 나에게 살짝

 "세발짜리 오토바이가 있다던데" 하고 말했다.

오래오래 아끼고 안 먹고 모은 용돈으로 아빠가 마련하고 싶었던 마지막 아빠의 자가용.


지금도 삼륜차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나고

그러면 이내 슬퍼지고 미안해지고 우울해지는 건

내가 그 때 아빠에게 좀 더 비싸고, 좋은 삼륜차를

골라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다.


저렴한 게 제일 좋은 줄 알았다.

너무 어설프고 정보도 꼼꼼하게 챙기지 못했고

바보같이 좋은 게 좋은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고른 삼륜차는 생각보다 먼 거리를 운행하지 못했고

가다가 도로에서 서버려서 아빠를 난감하게 한 적도 있었다.


내 수중에 돈이 없었더라도

좀 더 아빠의 튼튼한 다리가 되어줄

좋은 삼륜차로 꼼꼼하게 골랐더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아빠에게 좀 더 그럴싸한

세발오토바이를 선물했더라면

아빠가 좀 더 자유로웠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매번 든다. 삼륜차를 볼 때마다.


그래도 아빠는 늘 내가 고향집에 내려갈 때마다

"우리딸 없었으면 이런 것도 몰라서 못 사고 어쩔뻔 했냐"며 입이 마르도록 나를 치켜세다.

세상에 그렇게 무능하고 어설픈 딸이 없는데도

지금까지도 이렇게 속이 상하고 미안해하고 있는데도.


나는 내가 얼른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사서

아빠를 조수석에 태우고 좋은 꽃도 보러 다니고

병원도 모시고 다니고 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아빠는 내 조바심보다 더 서둘러 떠났다.

그래서 삼륜차가 더 애잔하다.

볼 때마다 더 우울하고 슬퍼진다.


바보같은 나를 너무 사랑해준 아빠한테 미안

받은 사랑을 끝까지 어설프게만 갚은 나한테 화가 나서

우두커니 서 있는 삼륜차를 볼 때마다

마음이 말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메리지블루와 신부 입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