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렘 May 03. 2022

할머니 리어카의 봄, 꽃, 편지


문경의 한 작은 마을. 

천변 산책로 가득 벚꽃이 피었다. 


"올해도 꽃이 피었소. 

작디 작은, 여리디 여린 꽃잎들이 저희들끼리 옹기 종기 모여 한송이 꽃이 되었다가 

이내 다시 혼자가 되어 한 잎, 한 잎 홀로 땅으로 떨어지는 걸 보니 

당신과 함께 했던 수십 년의 세월이 한없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소. 


우리의 시절에는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좋은 옷 차려 입고

당신 손 붙잡고 꽃 구경 한 번 나서질 못했는데, 

세월은 야속하게도 흐르고 흘러 수십 번의 봄을 허비해 버렸소. 


어느 틈에 당신 머리에 내려 앉은 세월에 머리는 새고 허리는 굽어 

당신은 차마 꽃길로 걷지를 못하는 구려. 


꽃송이같이 고왔던 당신이 나를 만나 봄같은 봄 한번 누리지를 못하고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이 되었는데, 

나는 그마저도 곁에 있지 못하고 이리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못내 마음이 쓰인다오. 


그대 가는 길이 바빠도 돌아올 적에는 꽃길로 오시오. 

힘겹게 미는 수레, 얼기설기 맨 앞치마 거기 다 벗어두고 

돌아올 때에는 당신, 고운 꽃길로 천천히 오시오. 


우리 여기에서 고운 옷을 차려입고 다정히 손을 잡고 

흐드러진 벚꽃 아래 같이 섭시다. 

같이 서서 서로를, 오래토록 들여다 봅시다. 

꽃보다 오래, 서로를 그렇게 들여다 봅시다."



하루 해가 떨어지기 전, 주운 폐지로 가득해질 할머니의 리어카 어딘가에 

할머니에게만 보이는 글씨로 적힌 할아버지의 편지가 한 통 실려있는 상상을 한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허기를 면한 할머니가 

적십자에서 가져다 준 반찬 몇 가지를 플라스틱 용기 그대로 차린 밥상을 물리고 앉아 

할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편지지에 떨어진 벚꽃잎 한 장 끼워 고이 접은 채 

할아버지 영정 사진 앞에 조용히 올려두는 상상을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을 맞잡고 이 생에서 못 해본 꽃놀이를 실컷 하는 상상을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