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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렘 Oct 29. 2022

오토바이는 달린다  

오토바이 모범 동승객이 되는 법 

다 큰 어른이 되고 나서, 우연히 다른 사람이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탄 적이 있다. 

우연이라기엔 좀 뭐하고 의도된 거라고 하기에는 좀 더 뭐한 아무튼 그런 상황이었다. 

그는 종종 뜬금없이 안부를 묻거나,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평일에 예고 없이 만나서 조용한 동네 (서울 하늘 아래 그런 동네가 많진 않지만)에 가 차 한잔 하는 게 자연스러워진 친한 선배였는데, 그가 자가용 대신 파란색 오토바이를 한 대 장만한 것이었다. 


계단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지하철을 피해, 세상 모든 교통 체증은 다 안고 있는 것 같은 시내 

한복판의 버스를 뒤로 하고 오토바이로 솨아아악 서울 시내를 내달리는 기분은 꽤나 통쾌했다. 한 번은

선배를 만나기로 한 날짜에 회의가 길어져 광화문으로 선배가 직접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직 완연한 여름이 되기 전, 늦봄이었다. 파란 스쿠터만큼이나 파아란 자태를 뽐내는 믿음직한 헬멧을 쓰고, 너무 부담스럽지도 또 너무 위험하지도 않을 선에서 선배 허리춤의 옷자락을 잡고, 광화문을 지나 8차선 도로를 뚫고 서촌으로 달리는 길은 뭐랄까, 한없이 모범생으로 살아온 서울 하늘 아래에서 내가 갑자기 세상 속박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영혼이 된 기분이었다고 할까.  


이십분 쯤 달렸을까. 인파를 피해 도착한 평일 대낮의 서촌 어느 구석 놀이터 한켠에 오토바이를 세우면서 

선배가 말했다. 



"너 오토바이 잘 탄다. 지금까지 내가 뒤에 태워본 사람들 중에 제일 안정적이야. 커브 돌 때 몸을 반대쪽으로 해서 중심을 잡는 게 거의 본능적이던데"



내 오토바이 동승경력은 꽤나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 

어릴 적 엄마는 나를 데리고 오랜만에 이모들을 만나러 대전에 가거나 오랫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때도 여자들은 모이면 어김없이 남편 뒷담화를 했더랬다) 아빠를 향한 

칭찬도 아닌 험담도 아닌 애매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얘들 아빠가 아들 셋 키울 때는 똥귀저귀 한 번 안 갈아주더니 늘그막에 딸래미 낳았다고 이뻐 죽겠는지 

허구헌날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잠 마실을 얼마나 다니는지 몰러. 애 잘 때까지 들어올 생각을 안하더라고. 

야도 웃기지, 오토바이 안태워주면 잘 생각을 안 해 잘 생각을. 

오토바이 뒤에 앉혀놓고 사진은 또 얼마나 찍어주는지 야 오빠들 사진은 한장도 없는데 야 사진이 하도 많아서 넣어놓을 데도 없는디, 찍기는 자-꾸 찍어싸코. 참말로-" 



(엄마 목소리, 엄마가 말하던 분위기는 여전히 생생히 기억나는데 엄마가 친한 사람들한테 말할 때 어떤 어조로 말을 끝맺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려도, 그 목소리를 문장으로 적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낯설고 왠지 엄마의 말투가 아닌 것만 같다. 당장 전화를 걸어서 엄마의 말투를, 엄마의 문장을 확인할 수도 없으니 더 난감하다. 어쩌면 앞으로 내 글들 속에서 엄마의 말투와 사투리는 그때그때 달라질지도 모르겠다..엄마에게 미안하다. 오롯이 기억하고 간직하지 못해서. 그러고 싶었는데.) 


그건 그렇고. 

어쨌든 나는 거의 걸음마를 뗀 후부터 아빠 오토바이 뒷좌석에 안전하게 타고 내리는 법을 몸으로 익혔고, 

매일같이 이어진 아빠의 잠마실로 미루어 보건대 나는 아마 오토바이 뒤에서 자는 방법까지도 몸소 익혔던 것 같다. 



추풍령은 시골 중에서도 상시골이라 당시에는 포장 도로보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많았다. 

그럼에도 아빠의 오토바이 뒷좌석은 안락하고 편안했다. 바람 결에는 아빠의 땀 냄새가 적당히 실려오고,  

때마침 솔솔 밀려드는 잠기운을 애써 뿌리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꽤나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아빠의 오토바이는 우리집 자가용이었고, 난생 처음 휴대폰을 인터넷으로 주문한 후에 목이 빠지게 배송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중학생 시절, 쉬는 시간을 틈타 학교로 내 휴대폰을 가져다 준 것도 아빠의 빨간 오토바이였다. (아니, 사실은 빨간 오토바이를 탄 아빠였지) 기숙사 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늦잠을 자버린 어떤 날에는 50분 동안 아빠 등 뒤에서 찬바람을 피하면서 헐레벌떡 학교에 가야했던 날도 있었다. 사춘기에 들어서서는 다른 친구들이 그럴듯한 자가용에서 내릴 때, 나만 오토바이에서 홀랑 내려야 하는 게 조금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맹세컨대 아빠가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아빠가 돋보기를 쓰고 운전면허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노력했던 그 때에도 나는 아빠가 자랑스러웠고, 결국 필기 시험에서 몇 번이나 낙방을 해서 빤한 실기 시험조차 치르지 못했을 때에도 나는 아빠를 사랑했다. 



가끔은 반사적으로 시골 거리에서 빨간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마다 아빠를 떠올린다. 험담인듯 칭찬인듯 아빠의 오토바이를 이야기하던 엄마의 수다도 생각난다. 나는 그럴 때면 내 존재가 꽤 쓸모있다는 것인지, 내가 잘했다는 것인지, 아빠가 잘했다는 것인지, 아빠가 잘못했다는 것인지, 그 말들의 의미가 헷갈렸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던 엄마의 표정에 얼마간의 미소가 동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기에 후자는 아닌 것으로 결론짓기로 한다. 


오토바이는 사랑이었고, 험담같은 칭찬이었고, 애정의 표현이었고, 보호받는다는 기분이었고 이제는 추억이다. 선배에게선 시큼한 땀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오토바이 뒷좌석의 편안함은 그런대로 비슷했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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