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록] 1편_결혼
12살, 7살 두 아이의 엄마로 얼마 전 새로운 생명을 품게 된 그녀는 남편을 따라 해외에 거주 중이다. 다둥이 부모의 내공은 결코 따라갈 수 없을뿐더러 12년 차 ‘중견 결혼생활’은 아직 상상도 잘 되지 않지만 우린 공통점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반가웠다. 그녀는 웃음이 많았고 ‘다들 비슷하지 않겠냐’는 말들로 자신의 어제와 오늘에 남다른 그늘을 드리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약간의 ‘해탈’도 느껴졌던 차분한 그녀와의 이야기 중에 오히려 스스로 흥분하여 횡설수설하지 않았나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녹음된 대화를 다시 듣고 그녀의 말들을 글로 기록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하나씩 꺼내 놓은 이야기 속에, 그 들숨과 날숨 속에 치열한 자기 투쟁의 자국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에 놀라고 또 놀랐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조금은 내려놓다가도,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그녀. 먼 곳에 사는 결혼 12년 차 사과나무(가명)와의 대화를 기록해 본다.
* 해외 거주지 및 대화를 나눈 이의 실명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가명으로 쓴 ‘사과나무’는 대화를 기록한 이가 임의로 정한 것입니다.
* 글에 실린 사진은 이야기를 나눠주신 분의 개인사진이니 임의 사용을 하지 말아주세요.
@ 해외에서의 일상은 왠지 국내서와는 좀 다른 모습일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챙겨 보내고 오후 3시쯤에 둘째 데리러 가야 해요. 그러면 또 하원 후의 활동이 있잖아요, 간식 먹고 저녁 먹고. 늘 겪으시는 비슷한 육아죠. 해외라고 별로 다르진 않아요.
@ 한국이 워낙 노동시간이 긴 나라라, 외국에서라면 워라벨을 누리며 살 것 같기도 하고요.
저희도 사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왔었는데 직종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 오고 처음엔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었어요. 기대와 전혀 다른, 너무 바쁜 신랑의 업무 때문에요. 한국에서는 도와줄 가족들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오로지 저 혼자 다 해야 하니까요.
@ 결혼 12년 차에 첫 아이가 열 두 살이면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만난 셈이네요.
결혼도 그렇고 임신, 출산, 육아가 너무 갑자기 이뤄졌어요, 사실. 계획은 아니었죠. (웃음)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연애를 했어요. 후기 졸업식이 8월이었는데 그 전 5월에 결혼하고 신랑하고 졸업식에 같이 갔죠. 시댁 쪽에서 빨리 결혼하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원래는 더 빨리 하자는 걸 좀 텀을 둔 거에요. 또 저희도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죠? 연애에 불이 붙어서. (웃음) 2년 반 정도 연애하고 스물 여덟에 결혼한 거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왔고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결혼은 이 사람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기나 계획은 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흘러갔던 것 같아요.
@ 연애 2년 반이면 콩깍지가 벗겨질 때가 됐을 것도 같은데. (웃음)
인연인 것 같아요. 마음이 움직였어요. 교회에서 만났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좋았고, 신랑도 처음부터 저에게 “너랑 결혼하겠다”고 하고.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 더 안정감을 가지고 공부도 하고 제가 준비했던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빨리 아이를 만나게 된 거죠. 그렇게 갑자기 육아의 세계로. (웃음)
@ 예상과 다른 현실을 만난 거네요.
그렇죠. 그래서 임신 기간에도 그렇고 육아 초반에, 첫째 낳고 키우면서도 정말 우울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셔서 마음을 다잡으려고도 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또 그땐 주변에 양가 부모님들이나 다들 바쁘셔서 많이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서 제가 거의 육아를 담당했거든요. 그러면서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죠. 난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우울하고 무기력한 감정이 정말 심했던 것 같아요. 첫째 아이가 서 너 살이 되어서 기관에 다니기 시작하고부터 공부도 하고 강의도 들으러 다니고,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때서야 생겼어요. 결혼 후부터 정말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 어떤 고군분투의 시간이셨어요?
아무래도 대학원 졸업 후에 바로 출산, 육아를 하다 보니 사회생활 경험이 전혀 없잖아요. 거기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 같아요. 일하는 엄마. 제가 국어교육을 전공했는데 선생님 준비도 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나고서는 스터디도 하고, 또 제가 뭔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아니까 주변에서 좋은 강의가 있다거나, 좋은 교육이 있다고 알려주시기도 해서 제 상황이 되는 한 신청해서 들어보려고 하고요. 열심히 지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과정 중에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가 생겼어요. 여기 오기 전에 3년 간 교양 강의를 했었는데, 그 시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성취하는 기회가 생기고, 저의 좋은 기운이 아이에게도 흘러가고 남편과의 관계도 좋아지고요. 저는, 제가 중요한 사람 같아요. 대학에서 수업했던 것도 나를 알아가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거든요. 그런 걸 많이 생각하면서 지내온 것 같아요.
어찌 보면 남편도 제가 뭔가를 해보려고 할 때마다 많이 도와줬던 것 같아요. 아웃풋이 없는 인풋일 수도 있는데 수강료 같은 것도 지원해주고, 외부로 교육을 나갈 때도 여러가지로 신경 써 주고. 제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어떤 어려움들을 이야기하면 남편은 사회생활을 많이 한 사람이니까 조언이나 피드백들이 제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신랑이 의사결정 같은 걸 서로 대화하며 찾아가는 게 아니라 좀 통보하는 스타일이고 저는 그걸 따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에 대한 고민들도 많았지만요. 그래서 ‘아, 이 사람은 사회 선배로 만나면 참 좋은 사람이겠구나' (웃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해외에서 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어요?
신랑이 회사에서 주재원 발령을 받았어요. 신랑이 목표하던 일이었거든요. 제가 사회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을 때였고, 강사지만 내려놓기 너무 아까운 자리라 이렇게 내려놓으면 다음에 다시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일단 가족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신랑과 같이 나오게 됐어요. 이제 3년 정도 지난 것 같아요.
@ 저도 출산, 육아와 함께 일을 그만두고 남편이 있는 타지로 생활 터전을 아예 옮겼거든요. 아이도 어리니 내 뜻대로 뭔가를 할 수 있지도 않았고요. 그런 시간들이 더해질수록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에 점점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감이 더 크게 다가왔었어요. 그게 더 괴롭더라고요.
맞아요. 공허함, 무기력감이라는 단어가 되게 와 닿네요. 처음엔 저도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어요. 거기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리고 그간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여기서는 내가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뭘 하려고 하지 말고, 20대 때부터 끊이지 않았던 생각과 마음을 내려놓고 나를 좀 쉬게 하자, 좀 놀자, 그러고 왔던 것 같아요.
처음 몇 달간은 여행자처럼 이곳저곳 다니고 좋았는데 시간이 흐르니까 공허하고 무기력해지더라고요. 나는 여기에 왜 있는지,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 때부턴 항상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일단 왔으니 3년 만 버텨보자, 하고요.
@ 여행과 실거주는 분명 다르죠.
여기 와서도 신혼 초처럼 맞춰가야할 게 되게 많았어요. 신랑이 1년 정도 먼저 와서 살고 있었고 저와 아이들은 나중에 왔는데, 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렇게 사람이 많이 변할 수 있을까, 나와 같이 살던 신랑 맞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달라진 것 같았거든요. 아마 서로가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랬던 것 같아요. 신랑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겠죠. 특히 한국에서 남편은 일이 바빠도 주말에는 가족과 있으려고 하는 노력이 보였는데 여기서는 주말에도 아빠가 없는 거에요. 육아는 전부 저의 몫이었고 남편이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많이 부딪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혼까지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흔히들 결혼 10년 차면 위기가 찾아온다고도 하잖아요. 저희는 환경의 변화라는 것까지 맞물려서 서로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그걸 맞춰가는 과정에서 정말 많이 싸웠거든요. 그런데 이혼에 대해서 예전과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게, 이혼이 지금의 상황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거든요. ‘아, 그렇구나, 이혼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구나’, 하고요.
당시엔 이렇게 싸우면서 서로 힘들게 살 필요가 없겠다고, 이혼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한 적도 있고요. 저희가, 좋아하는 감정도 그렇지만, 싫어하는 감정도 서로 불 같은 거에요. (웃음) 특히 저는 신랑한테는 좀 더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결혼 후 제 생활을 ‘투쟁의 역사’라고 이야기해요. (웃음) 남편도 그때는 격해 있었던 상황이라서 제 말에 엄청 동의했어요. (웃음) 그런데 이후에 같이 운동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도 더 나누게 되고, 조금씩 사이가 개선이 된 것 같아요. 아, 이 사람에게 이런 좋은 면도 있었구나, 하고요.
@ 투쟁의 역사가 궁금해지네요. 어떤 것을 위하여 어떻게 투쟁하셨는지요.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한, 너무 좋아한 사람이었는데, 막상 일상에서 부딪혀보니 너무 달라서 (웃음) 둘이 맞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결혼하고 정말 많이 싸웠어요. 너무 많아서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로. (웃음)
지금까지도 저의 화두는 ‘경제권’이에요. 지금 경제권을 신랑이 가지고 있는데 저는 신랑에게 생활비를 받아쓰는, 이런 삶을 살게 될 줄은 몰랐고 이런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경제권을 달라고 했거든요. 투쟁해서 얻어낸 신랑과의 타협점이 “우리 가정의 빚을 다 청산하면 그때 경제권을 넘겨주겠다”였어요. 그런데 빚을 다 청산한 다음에도 경제권을 주지 않더라고요, 원래 하던 사람이 해야 한다면서요. ‘원래 줄 마음이 없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특히 해외로 나와 살면서 한화가 아닌 현지 화폐로 월급을 받고 초기에 제가 여기서 금융거래를 하지 않고 남편에게서 현금을 받아 쓰니까 아예 경제권은 신랑에게 굳혀진 거죠. 그렇게 10년이 넘었잖아요. 제가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이제 그만 투쟁하자, (웃음) 이 정도면 많이 했다, 하고요.
@ 경제권을 갖는다는 게 본인에게 어떤 의미이길래 10년 투쟁을 하신 건가요.
저는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잖아요. 만약 결혼을 일찍 하지 않았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니 직업이 있었을 거고, 수입이 있었을 거고, 그걸 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다 보니 거기에 대한 생각이 컸어요. 용돈이나 생활비가 아니라, 온전한 가정의 수입을 운용해 보고 싶다, 그리고 제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되게 많이 했고요.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거죠.
@ 외벌이의 경우, 가사나 육아를 주로 담당하는 배우자의 노동력이 또 다른 배우자의 수입이나임금에 포함된다는 문화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베이비 시터를 구하거나 세탁소, 음식점 등을 이용할 때 비용을 지불하는데, 그것이 가사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가면 얼핏 ‘돈이 안 든다’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누군가는 노동을 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데도 말이에요. 또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 부분에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배우자의 역할이 크고요.
저도 항상 그 생각을 했죠, 내 노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는 거요. 경제권을 갖고 싶다는 고민들도 그런 맥락이에요. 이런 것들을 신랑과 이야기하고 투쟁해서 나온 게, 저는 신랑에게 월급을 받아요. 생활비를 따로 받지만 나의 노동력에 대한 월급을 달라고 했어요. 여기 와서부터니까 2, 3년 된 것 같아요. 많은 금액은 아니고 신랑의 나이만큼, 그 정도의 월급은 내가 받을 수 있지 않냐고 했어요.
노동력에 대한,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놀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시간에 내가 어딘가에서 일을 하면 이것보다 훨씬 많이 벌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30대에는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40대가 되니까 조금 마음이 달라지기도 하더라고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까? 하고요.
@ 상대의 노력은 사회적 커리어로, 월급으로 보이는데 나의 노력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는 게 참 허탈할 때가 있죠.
여기(해외)에 온 것도 신랑이 사회생활하면서 자기 목표를 이룬 거지, 저의 목표는 아니었잖아요.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신랑이 성공하고 목표를 이뤄가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어요. ‘왜 당신만?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는 왜 육아와 가사의 묶여 있어야 하는 상황인가’ 그런 고민이 계속 마음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진짜, 결혼 과정 중에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한 사람만 성장해가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결혼은 둘이 같이 성장해야만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일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결혼생활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스스로 뭔가를 성취하고 돈을 벌고, 그걸로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신랑은 자기는 결혼 생활 중에 다르게 한 건 없대요. 자기는 늘 똑같았는데 제가 달라졌기 때문에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거라고요. 맞는 말 같아요. 지금은 그런 고민에서 좀 편안해지긴 했어요. 좀 놓은 것도 있고 신랑과 같이 운동하면서 서로 이야기하며 좋아진 것도 있고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이른 나의 선택이 잘했다 싶은 점은 무엇일까요.
가족들이 함께 있다는 거죠. 늘 그걸 중요한 이슈로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온다고 생각을 했던 거고요. 어른들이 늘 하시는 말씀에 부부는 각방 쓰면 안 된다, 가족은 떨어져 지내는 거 아니다, 그런 말들을 귀담아 들었거든요. 애쓰고 노력하면서 지냈죠. 사실 남편이 먼저 이곳에 와 있을 때 둘째가 되게 예민해졌었는데 다시 여기 와서 아빠를 만나고 괜찮아졌어요. 가족은 어쨌거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 그럼 앞으로 계속 해외에 거주하시는 건가요?
한국은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생활하면서 가끔 한국 가면 되게 즐겁고, 못 만났던 친구나 가족들과 시간 보내며 좋은 에너지를 충전해서 여기서 살아갈 힘을 얻었거든요. 올해 코로나로 1년 간 한국에 못 가고 있으면서 더 깨달았어요, ‘난 한국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요.
저는 아이들을 많이 키워놓은 상태라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새로운 40대를 만나보자고요. 그런데 셋째를 만나서. (웃음) 8주가 좀 안됐어요. 신랑이 하는 얘기가 “끝났지, 뭐” (웃음) 그래서 출산도 있고 여러가지 면에서 내년 쯤 아이들과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마도 3, 4년간은 뭔가를 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아서 고민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좀 편안한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그간 아이 키우면서 ‘뭘 해야 하나’ 했다면,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잘 키워보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세 아이 중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처음인 것 같아요.
@ 두 아이의 엄마도 힘들지만, 세 아이의 엄마가 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잖아요.
세 아이들이 다 나이 차도 있고. 이제 육아 이야기 들어갈까요? (웃음) 쉬운 일이 아니죠, 누구나 그렇듯이. 사실 제가 요리를 잘 못해서 아이들 먹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되게 커요. 한국에서는 부모님한테 반찬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한국 재료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보니까, 아이들에게 건강한 걸 해줘야 하는데, 그런 부담이 여기서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 ‘결혼’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오래 생각해 보았는데, 앞으로 살면서 나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계속 찾아야 하는 물음 같아요.
@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놓여진 상황들을 똑같이 마주하게 된다면?
신랑에게도 하는 말이, 만약 20대 중반으로 돌아간다면 저는 결혼을 하진 않을 것 같은데 당신과는 남녀가 바뀌어서 만나보자고 해요. (웃음) 지금 신랑이 너무 강력한 남성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당신도 여자의 역할을 해봐라, 그런 거죠.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최대한 저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요. 아마 여기(해외)에도 안 오고 한국에서 제가 했던 일들을 계속 하면서 제 시간을 가져볼 거에요. 안 해봤던 거 해봐야죠. (웃음) 후배들한테도 정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주변의 시선이나 영향으로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또 제가 결혼을 했으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들 하겠죠.
결혼은,
서로의 결을 맞춰가는 시간.
그 과정이 결코 쉽지 만은 않지만, 겪고 나면 더 편안해지는 시간이 찾아오는 것.
결혼 12년 차,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될 사과나무